이성복, ‘다시, 정든 유곽에서’

1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우리의 하품하는 입은 세상보다 넓고
우리의 저주는 십자가보다 날카롭게 하늘을 찌른다.
우리의 행복은 일류 학교 배지를 달고 일류 양장점에서
재단되지만 우리의 절망은 지하도 입구에 앉아 동전
떨어질 때마다 굽실거리는 것이니 밤마다
손은 죄를 더듬고 가랑이는 병약한 아이들을 부르며
소리없이 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우리의 후회는 난잡한 술집, 손님들처럼 붐비고
밤마다 우리의 꿈은 얼어붙은 벌판에서 높은 송전탑처럼
떨고 있으니 날들이여, 정처 없는 날들이여 쏟아부어라
농담과 환멸의 꺼지지 않는 불덩이를 발(發)차의 유리창 같은
우리의 입에 말하게 하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 지를

2
철든 그날부터 변은 변소에서 보지만 마음은 늘 변 본 그 자리
를 떠나지 못하고, 명절날 고운
옷 입은 채 뒹굴고 웃고 연애하고……
우리는 정든 마구간을 떠나지 못하며

무덤 속에 파랑새를 키우고 잡아 먹고
무덤 위에 애들을 태우고 소풍 나간다 빨리 달린다
참 구경 좋다 때때로

스캔들이 터진다 색이 등등한 늙은이가
의붓딸아 범하고 습기 찬 어느 날 밤 신혼부부는
연탄 가스로 죽는다 알몸으로, 그 참 구경 좋다

철든 그날부터 변은 변소에서 보지만 마음은 늘 변 본 그 자리
를 떠나지 못하고, 악에 받친 소년들은
소주 병을 깨고 제 팔뚝을 그어도…..
여전히 꿈에 부푼 식모애들은 때로, 사생아를 낳지만

언젠가, 언젠가도 정든 마구간에서 한 발자국, 떼어놓기를 우
리는 겁내며

3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손가락을 발바닥으로 짓이긴다
우리는 살아 있다 애써 모은 돈을 인기인과 모리배들에 헌납한다
우리의 욕망은 백화점에서 전시되고 고층 빌딩 아래 파묻히기도 하며
우리가 죽어도 변함없는 좌우명 인내! 도대체 어떤 사내가
새와 짐승과 나비를 만들고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제7일에
휴식하는가 새는 왜 울고 짐승은 무얼 믿고 뛰놀며 나비는
어찌 그리 고운 무늬를 자랑하는가 무슨 낙으로 남자는 여자를 끌어안고
엉거주춤 죽음을 만드는가 우리는 살아 있다 정다운 무덤에서 종소리,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후회, 후회, 후회의 종소리가 그칠 때까지

4
때로 우리는 듣는다 텃밭에서 올라오는
노오란 파의 목소리 때로 우리는 본다
앞서 가는 사내의 삐져나온 머리칼 하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무슨 소린지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안다 우리가
잘못 살고 있음을 때로 눈은 내린다
참회의 전날 밤 무릎까지 쌓이는 표백된 기억들
이내 질퍼덕거리며 낡은 구두를 적시지만
때로 우리는 그리워한다 힘없는 눈송이의
모질고 앙칼진 이빨을 때로 하염없이 밀리는
차들은 보여준다 개죽음을 노래하는 지겹고
숨막히는 행진을 밤마다 공장 굴뚝들은
거세고 몽롱한 사랑으로 별길을 가로막지만
안다 우리들 시의 이미지는 우리만큼 허약함을
안다 알고 있다 아버지 허리를 잡고 새끼들의
손을 쥐고 이 줄이 언제 끝나는지 뭣 하러 줄 서는지 모르고 있음을

5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낡은 구두에 묻은 눈 몇 송이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항시 머무는 먹장구름
우리가 예감할 수 있는 것은 더럽힌 핏줄 더럽힌 자식
병(兵)차는 항시 밥상을 에워싸고 떠나지 않고 꿈틀거리는 것은,
물결치는 것은
무거운 솜이불 아, 이 겨울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안개 낀 길을 따라 무더기로 지워지는 나무들
우리의 후회는 눈 쌓인 벌판처럼 끝없고 우리의 피로는
죽음에 닿는 강 한 끼도 거름 없이 고통은 우리의 배를
채우고 담뱃불로 지져도, 얼음판에 비벼도 안 꺼지는 욕정
보석과 향료로 항문을 채우고서 아, 이 겨울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잠 깬 뒤의 하품, 물 마신 뒤의 목마름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
귓속에
복숭아꽃
노래가
마을이 되는
나라로
갈 수 있을까
어지러움이
맑은 물
흐르고
흐르는 물따라
불구의 팔다리가
흐르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죽은 사람도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잔
권하는 나라로
아,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

6
그리고 어느 날 첫사랑이 불어닥친다
그리고 어느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온다
무너진 담벽, 늘어진 꿈과 삐죽 솟은 법을
가뿐히 타넘고 온다 아직 눈덮인 텃밭에는
싱싱한 파가 자라나고 동네 아이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 연을 날린다 땅에 깔린다
노래는 땅에 스민다 그리고 어느 날 집들이
하늘로 떠오르고 고운 바람에 실려 우리는
멀리 간다 창가에 서서 빨리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 한다
상상도 못 할 졸렬한 인간들을 그곳에서
만났다고….. 그리고 어느 날 다시 흙구덩이 속에
추락할 것이다 뱃가죽으로 기어갈 것이다
사랑해, 라고 중얼거리며 서로 모가지를 물어
뜯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것도 다시는
불어닥치지 않고 기다림만 남아 흐를 것이다.


이성복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에 있는 시이다…
다섯번째 연의 각 단어는 이곳에 올린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본 시집에 보면 가지런한 세로줄이 아닌 좌우로 뒤섞여 있다..
2004년 겨울 부대에서 기형도의 시집을 읽었는데
올해는 이성복과 릴케를 읽었다…
이순정집사님이 추천하신 김수영의 시는 조금 어려워서 평론집을 구입했다..
사실 김수영의 시는 처음 볼때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는데
깊이 이해하면 조금더 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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