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스와 종교(스크랩)

“인류근본의 주제들, 나는 그것들을 내눈으로 보기를 원한다”.

딕스의 이 신앙고백은 그가 그의 생애에 걸쳐 제작해 온 그의 우의적이고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준다. 그가 죽기 몇 년 전에 그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줄곧 그에게 해당되었던 일련의 문제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했는데, 우선 그의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즉흥적으로 녹음했고, 그 후 1963년에는 레코드로 제작되었다. 그는 이 녹음에 성경과 종교와 자신의 관계를 상세히 표현했다.

그는 성경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성경은 한 단어 하나씩 읽어야 한다. 위대한 진실이 그 안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지만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 사실적 요소 안에서 성경 그 자체 그대로이며, 구약성경 역시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책이다. 우리는 그것이 벌써 하나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책 중의 책인 성경은 교양의 역사이다. 문화사의 구상이며, 사회의 역사이며 모든 면에서 볼 때 정말 대단한 책이다.”

그의 신앙고백의 가치 외에도 위의 인용문은 또한 딕스의 삶의 본보기이며, 그의 연설이며 그가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나름대로 재확인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세 명의 형제 자매들처럼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인 오토 딕스는 영세와 견진성사를 그가 태어난 집에서 아주 가까운 Gera Untermhaus 성당에서 받았다. 우리는 1965년에, 그의 어린 시절에 그가 성경에 대해 느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처럼 굉장한 영상들이 거기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마음에 지니고 있을 때, 나는 항상 그런 일들이 나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확하게 숲속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거기에는 약간의 언덕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가 야곱이 누워 있었던 곳이고, 그래서 야곱의 사다리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그리고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 의해 버려진 그 우물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반시간 정도 가면 옛 Elstu의 강이 있고 그곳은 갈대와 등심초로 뒤덮여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 왕의 딸이 작은 바구니에 든 모세를 건져낸 곳이다.”

그는 또 덧붙이며 “그것들은 그저 영상들이며 그 나머지 도덕적인 일은 내게 전혀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도덕적인 측면은 틀림없이 그 시대의 어린이들에게는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었을 것이다.

그 얼마 후 그는 학교를 떠나고, 그의 세상에 대한 관점이 확실해졌다. 그는 프레드릭 니체의 작품을 발견하고, 이 발견은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정신적 생활을 지배하게 된다. 그는 죽음을 조금 앞두고 니체의 <즐거운 지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유일하게 공정한 철학자였다.”

오토 딕스는 1915년에 성경과 <즐거운 지식>을 갖고 전쟁터에 나갔다. 하루는 우리가 같이 Kerseldorferestrasse의 그의 화실에 가 보게 되었는데 우리는 읽고 또 읽었던 그의 책을 볼 수 있었다.

그 사이 딕스는 오랫동안 교회를 멀리 했었다. Hemmenhofen에서 그는 두 교파의 교회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무엇보다도 그에게 경제적 걱정거리가 있을 때 축복을 빌어 주는 것을 좋아했다.

1969년 7월 28일, 어느 지독히 더운 여름날, 그는 Hemmenhofen의 묘지에 매장되었는데 그 가족들의 뜻에 따라 Kattenhorn 마을 성당의 옛 신부님이 장례의식을 맡았다. 그 성당은 딕스가 성 베드로에 대한 스테인드 글래스를 세개 제작했던 성당이었다.

우리는 딕스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했었다. 1963년에 만들어진 그의 레코드에서는 “나는 내가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겠고,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아무 것도. 어찌 되었든 나는 교리를 믿지 않는다. 나는 아주 회의적이고 회의적이다.”

드레스데에서 하루는 그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를 따르라’는 크고 근본적인 요구에 나는 따를 수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 바로 다음에 만들어진 1963년의 레코드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모습을 심사숙고하며 이야기 해 나간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해 성경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그것을 직접 보면, 그것은 정말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가 말하는 실체의 인간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보아야 하고 자신 스스로 삶의 깊은 수렁 속에서 살아 보아야 한다. … 그렇지 않다면 그림책 속에서, 또는 성경에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 받으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 고통을 직접 느껴 보고,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 그래야 그것은 값어치가 있다. 말하 자면 존재 가치랄까!!! ….우리는 우리 자신 스스로 체험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론가에 불과하다. 죄를 짓지 않고서 누가 죄에 대해서 이해하겠는가?  아무도 못한다.… 우리는 깊은 지옥을 알고 나서야 천국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의견은 신중한 의견이고, 비밀의 이야기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다.

“이 예수의 생애는, 정말 불쌍하고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몇 명의 제자를 거느린 한 가난한 남자가 로마 귀족들, 건방진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 속에서 살아가는… 의심받는, 경멸과 조롱을 받는 그런 남자로, 그는 그런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를 커다랗고 수염이 난 꼼꼼한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 그는 제자들과 같이 걸어가고 … 내가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그러나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 아니 그건 현실적이 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신을 사기꾼으로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말끔하고 우아한 이 미지로 당신을 보여주고 있지만 전혀 그런게 아니었다. 고통, 사람들의 가난, 그런 것들을 하나도 보지 않고 있다. 가난에 찌든 한 남자를,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못 생기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는 그 정도로 경멸 당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모두 이해했을 거고… 그리고 민중들, 민중은 그에게 환호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래, 그후에는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아주 좋아했었다. 같은 민중이, 바로 그 사람들이 말이야. 그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아주 흡사하다. 거기에 꿈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아무런 꿈도. 그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야.”

딕스는 그의 의견을 계속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를 거기에 매달았다. 마치 그는 무용수처럼 거기 매달려 있었다. 그게 아니다. 잘 생기고, 친절하고, 멋있는, 아주 건장한, 그런 게 아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형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읽게 된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고, 무서운 일이다. 사지는 부어 있고, 그게 아니냐. 더 숨 도 쉴 수 없다. 끔찍한 죽음이다, 정말 끔찍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잘생긴 청년처럼 십자가 위에 올려 놓았다. 이것들, 이 모든 것들은 속임수다. … 모두 사기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보는 대신, 부활의 기적을 더욱 위대하게 느끼도록 아주 정확하게 사실적 관점에서 보는 대신에 말이다. 아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남자로 십자가에 달아 놓았다. 난 바로 이점이 못 마땅하다. 그것은 교회가 그런걸 원하기 때문이다.

난 그걸 거부한다. 난 그걸 항상 거부할 것이다. 절대로 받아 드리지 않을 것이다. 난 무엇이 진실임을 알고 그걸 거부한다. 그가 정말 위대한 인물이라면 가장 어려운 고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큰 고문을 당했는지, 그는 쓰러졌고, 그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에는 기절을 했다. 이런 모든 것, 모든 것들을 다 보여주면서 성직자들은 흡사 이것이 진짜 연극인 것처럼 모든 걸 다 재현했다. 그건 전쟁보다도 더 지독했다. 그는 혼자였다. 그는 이 모든 걸 혼자서 겪어야 했다.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모두들 그를 버렸다. 한 인간의 고독에 대한 숭고한 이야기이다. 숭고한! 한 천재의 이야기, 그리고 누가 그를 이해했는가? 평범한 소인들을 보라. 그들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 그것은 구역질 나는 일이다. 아니야 난 반대다, 절대 반대다.”

Colmar의 포로 수용소에서, 딕스는 그의 동료들이, 빵을 훔친 죄로 피로 뒤범벅 되어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가 그 자신의 기억을 모두 이야기하고 1933년경의 성경과 성스러운 전설을 주제로 한 세 번째 제작 시기의 그의 작품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서 그의 초기 시절, 세계 제1차 대전 전의 시기는 그냥 지나쳐 버려도 되리라 생각한다.

딕스의 표현에서는 성경의 사건들이 현재 우리 사회의 복합된 모습으로 나타난 다. 그것들의 메시지는 다양한데 본문에 충실하고, 풍자적이며, 종말적이고 비유적 이다.

일차 세계 대전 전의 초기시대

딕스의 내면 세계를 보여 주는, 종교를 주제로 한 초기의 작품들 중 아직 볼 수 있는 것은 (많은 작품들이 분실됐을 거라고 믿으며) ‘모자상’인데, 1912년경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 위에 그린 유화이다. 당시에 천을 씌운 캔버스는 학생이었던 그에게는 너무 비쌌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반 고흐의 표현적, 조형적 영향을 느낄 수 있는데, 딕스 자신의 스타일은 좀 더 후에야 나타나게 된다. 벌거벗은 수염 난 그리스도는 무릎을 꿇고 넘어져 있고, 뒤에서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손을 자신 의 양팔에 감싼 어머니, 그녀는 그의 쳐진 머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열려진 상처와 채찍으로 생긴 핏자국이 인간의 육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보였다. 머리의 월계관에는 비둘기를 볼 수 있고 (…). 이 초기의 작품의 숫자는 상당하다. 그가 여러 가지 다른 주제도 많이 다룬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1933년에서 1945년 피정 시기의 성인들의 전설과 그리스도의 주제

우리는 딕스가 자신의 작품을 구성할 때 어떤 식으로 옛 대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1936년에 ‘일곱 가지 죄'(교만, 탐욕, 음란, 질투, 탐식, 분노, 태만)의 주제를 선택하여 작업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나치 점령 아래서 얼마나 깊은 공포를 느꼈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그가 심리적으로 비탄에 빠졌을 때 제작되었는데 이것들은 독일인들의 끔찍한 운명을 증거 했다. 크리스토프 성인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당시의 그에게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구약과 신약성경을 주제로 한 1940년 이후의 유화와 파스텔

1946년 봄 딕스는 Hemmenhofen에 다시 돌아와 정착한다. 유화와 함께 성경을 주제로 한 연습 작품들을 그리게 된다. 반면 그 중요성을 여러 장 찍어 낼 수 있는 석판화로 대신한다. 1946년에 제작한 25점의 작품 중에, 7점을 성경을 주제로 한 작 품을 제작했는데 그 중 2점은 구약에 대해서이고, 5점은 신약에 관한 것인데 예수의 생애에 영감을 얻은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은 오토 딕스의 창작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작가에게는 제일 중요한 핵심적인 사건이고 그는 그것을 엄격한 형태로 표현했다. 1948년, 그는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장면’, ‘태형’과 두 점의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를 그리고 1949년에는 또 다른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를 그렸다.

딕스는 여기에서 피에 뒤범벅되어 자신을 조이는 말뚝에 눌린 채로 도형수와 군병에게 채찍질 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각기 다른 이 수난의 광경들은 먼저 파스텔화로 그린 후 유화로 제작하였다.

1948년의 ‘대십자가형’이란 작품에서는 딕스의 스타일이 발전된 과정을 볼 수 있다. 사건들은 더 기념비적이고 기본적으로 처리 되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인물이 전 화면을 차지했고 나무 형틀과 거기 달린 육체가 화면 구성의 중심을 자르고 있다. 두상은 로마 조각상과 비슷한 형태이다. 크게 뜬눈의 열린 동공은 공포에 가득한 채 관중에게 고정되어 있다. 십자가 아래에는 마리아와 요한만이 왼쪽에 있고, 한 로마 군병이 오른쪽에서 예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 1946년의 작품과 같으나, 근심하고 있는 사람이나, 처형당하는 사람이 작품을 제작할 그 당시의 모습이다. 아주 커다란 천사가 그리스도의 상처 난 양쪽 손에서 흐르는 피를 받고 있다. 딕스는 십자가형의 의미에 대해 항상 고찰해 왔고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을 해왔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애의 번민과, 확고한 신념의 강함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그에게 이러한 창조 행위를 할 그 힘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으면 그는 일하는 사람 특유의 방식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를 이해시키려는 그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주제를 표현한다면 그 작품의 생명은 얼마간밖에 지속되지 않습니다. 옛날의 대가들이 그랬듯이 그 사건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순교자를 동정심 같은 것은 배제 한 상태에서 보아야 합니다.”

1950년대부터 딕스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주제가 고갈된 것 같았다. 그리스도에 대해 제작한 작품들은 대개가 주문에 의한 것이었다. 1952년 Signen시에서는 Singen시의 가장 어려운 때 자신들을 도와 준 스위스의 Schaffhous시에 대한 선물을 위해 공모전을 주관했다. 딕스는 마르틴 성인에 대한 스테인드 글래스 프로젝트로 그 공모전에서 당선했다.

마태복음

1948년부터 오토 딕스는 여러 각도에서 제작했었던 성경에 관한 그림들을 석판화로 제작하기 시작한다. 색채 작품에는 드레스드의 고등 미술학교에서의 파스텔 작품, ‘Bruhi의 테라스’를 모델로 인용했다. 그 작업에서 인쇄공은 여러 가지 다른 판을 만들었는데 이렇게 해서 8개의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의 머리를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장면’, ‘십자가형’에서 그리고, 또한 ‘베로닉 성녀의 수의’ 등의 작품을 제 작하였다.

1950년에 오토 딕스는 베를린의 Kathe – Vogt – Verlag으로부터 루터의 기독교 마태복음서의 텍스트를 석판화로 제작 할 것을 의뢰 받는다. 그는 그 중요한 작품의 제작을 놓고 긴 시간 동안 망설인다. 1960년에는 33점으로 된 그의 석판화집이 완성된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딕스는 Josef Hegenbath처럼 어떤 통일성을 갖고 일관성 있는 구성을 유지해 나갈 줄 아는 삽화가가 아니였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딕스는 각 작품마다 그 나름대로의 구성을 하면서 다른 것들과 분리했다. 그러한 어려움에도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과, 이해하기 손쉬운 통일성 있는 33점의 석판화로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복음서의 내용을 표현하기 위하여, 딕스는 분필을 붓처럼 사용하여 23개의 전면 페이지와 10개의 반 페이지 짜리 석판화를 제작하였다. 책의 크기가 이러하며, 페이지 전면을 메운 거대한 책장들은 아주 감동적이다. 딕스는 아연판에 그리기 전에 데생을 먼저 하는데, 항상 그러하듯이 데생은 돌에 그린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생기 발랄하다. 인쇄를 할 경우에도 같은 판에 찍었다 해도 항상 정확하고 깨끗하게 찍히지는 않는다.

이제껏 유화에서, 또는 다른 그래픽 분야에서 다루어 오면서 약간씩 변화를 주어 제작해 왔었던 여러 가지 주제들을 아주 근본적으로 단순화시켜 가는 작업을 하는데, 그 작업은 기념비적인 요소가 있으며, 특별히 그의 마지막 작품 제작 시기에는 세부적 묘사를 배제하게 된다.

그는 성경의 대부분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했다. 그중 중요한 석판화 중에 하나를 꼽는다면 틀림없이 ‘예수의 세례’일 것이다. 요한은 요단강 상류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 위로 성령의 흰 비둘기가 보이는 인상적인 구성이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의 시험’이라는, 1946년의 그림을 다시 그려서 그 같은 해에 석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또한 위의 작품들과는 반대로 세 개의 시리즈 작품인 ‘베드로의 소명’, ‘갈릴리 바다의 어부’와 ‘산상의 서약’ 등의 작품은 모두 새로운 작품들이다. 딕스는 여기에서 삼각형의 구성으로 표현된 축복 받은 군중들 속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를 재현했다. 성경의 다른 장들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성경 내용 중 ‘잔잔하게 된 풍랑’에 대한 것 외에는 볼 수 없게 된다. 이 어려운 주제를 다루기 위해 딕스는 바람에 부풀린 커다란 돛과 어려운 상황에 처해 보일듯 말듯 하며, 겁에 질려서 배의 한쪽 구석에 있는 제자들 모습 가까이에 예수를 그렸다. 반 페이지가 되는 ‘요나의 표적’ 이란 작품은 한 페이지 작품인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 이어 진다. 위의 장면들을 표현하는데 있어 딕스는 또 한 번 그 자신에게 어울리는 작업을 한다. 그는 헤롯왕을 육중하고, 음흉한 시선으로 표현하여, 앞가슴을 다 드러낸 창녀 같은 분위기의 살로메의 딸 옆에 앉아 있게 했는데 (1946년에 제작한 사울과 같은 형식으로), 그녀는 쟁반에 세례요한의 머리를 담아 자기 어머니에게 갖다 주고 있다.

‘예수의 변용(變容)’에서는 역시 아주 힘든 거장의 솜씨를 발휘했다. 사실적인 주제와는 반대로 흑백의 대조를 아주 강하게 나타냈는데, 딕스는 여기에서 이 작품을 거의 투명하게 표현했고, 아주 비현실적 상황으로 이 작품을 묘사하는데 성공했다. ‘예수의 납세’라는 작은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의 중요한 흐름을 중단시켰다. ‘천국의 임금’에서 딕스는 성경 본문 중에서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것에서만 다시 취급했다. 주님은 많은 군중들에 둘려 싸여 있고, 배경에는 예루살렘의 집들이 표현 되어 있는 구성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딕스는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열 명의 처녀들’에 대한 비유로 뛰어 넘는다. 그는 다섯 명의 미련한 처녀들과 또 다른 다섯 명의 현명한 처녀들을 두 줄로 표현해 한 줄 위에 다른 줄을 구성하고 각자에게 특유의 표정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파스칼의 천사’에 이어 ‘최후의 만찬’의 작품이 이어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여기서의 그리스도는 젊고 수염이 없는데 제자들 틈에서 빵을 떼고 있고, 배반자 유다는 거의 식탁 밑으로 숨어 있어 그의 불타는 듯한 눈만을 보여 준다. 감람산의 광경 ‘겟세마네’는 1948년에 그린 유화가 변화된 작품인데, 세로로 제작되었던 작품이 가로로 그려져 자유로운 형상에 더 알맞게 되었다.

예수 수난기의 초기인 ‘예수의 체포’란 작품에서는 아주 강렬한 장면을 그렸는데, 전면에 예수가 유다와 대화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베드로의 부인’에서는 1958년의 석판화를 단순화시켰는데 그 작품에서는 공포의 느낌이 풍기도록 표현되 었다.

계속 되어지는 두 페이지에는 그것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유대인의 왕께 인사드립니다’란 작품을 제작했고,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상’, ‘능욕 당하는 장면’은 1948년의 유화 작품에 해당된다. ‘십자가의 길’과 ‘태형’은 같은 모델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그래픽적으로 새로운 표현을 하는데 엄격하고, 다양한 표현을 하는 딕스는 자신의 작품을 베끼는 적이 절대 없고 그것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참고할 뿐이다. ‘무덤 의 천사’에서 작가는 새로운 드라마틱한 감동의 순간을 상상하며 그려본다.

예수의 생애에서는, 특히 ‘세례’, ‘산상의 서약’, ‘소경을 고침’, ‘천국의 임금’,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과 ‘최후의 만찬’까지에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젊고, 수염이 없는 예수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와는 반대로 수난의 예수에서는 ‘능욕 당하는 장면’부터 ‘십자가 형’까지, 예수의 얼굴에는 깊은 고통이 새겨져 있다.

오토 딕스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리스도적 요소는 아뜰리에의 어떤 아이디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내 자신의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충분한 문제가 내 생애를 통해 있어 왔다. Hidb, 크리스토프, 방탕한 아들, 그리고 베드로와 닭 울음소리, 이런 모든 것이 성경의 주제일 뿐만이 아니며, 내가 그것에 흥미를 느꼈기에 다룬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반대로 내 자신의 비유이며 인류의 비유이다. 그 점이 나를 앞으로 나가도록 떠밀었다. 그리고 나를 끌어당긴 것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진부한 주제 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해 보려는, 끊임없이 새롭게 변해 가는 그리스도교와 같이 미술도 새롭게 해 보려는 나의 생각이었다. 그리스도적 주제는 구성에 있어서 자유를 보장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걸 알고 그것을 이해하며, 말하자면 새로운 방법으로 느끼게 하여, 환상적 이미지만 실려 있는 책이 아닌 진정한 삶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적 테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관여되며 거기에는 시간의 저편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적 고전주의와 아폴로적인 것이다. 단 한가지만은 피해야 하는데 옛것을 새로운 형식으로 덮는 것이다.

마지막 작품들

마태복음에 대한 1960년의 33점의 석판화들이 딕스의 종교화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 1958년의 ‘다비드와 사울’의 변형작품 후에 그는 또 다시 한 번 새롭게 그 테마를 다룰 필요를 느꼈는데 그것은 ‘십자가 들어올리기’로, 두 가지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다. 1958년에 제작된 작은 작품과 그것에 의해 제작된 더 중요한 1968년의 작품이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구절에 의거하지 않고 화가가 지어낸 것이다. 또 한 번, ‘능욕의 장면’과 ‘태형’에서처럼 형리가 화면 중앙에 있고, 그는 밧줄로 주님이 매달린 십자가를 올리고 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비되는 괴기스러운 요소들이 섞여 있다. 석판화 작품들은 1968년에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상’으로 완성 되었는데, 정면을 향한 그리스도상인 1962년의 정확한 선의 두상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추상적이고 더 단순화된 색들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한가지 두드러진 점은 가시관의 진홍 빛깔과 얼굴의 핏방울이다. 마지막으로 종이 위에 그린 그래픽 작품은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Fritz Loeffler
번역: 박순우 96. 8. 26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