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arable of the Blind Leading the Blind, 1568, tempera on canvas, Galleria Nazionale at Naples


– 미술평론가 노성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 무슨 일일까? 한 무리 거지 떼가 겨울 스산한 들녘을 가로지른다. 모두 앞 못보는 소경들이다. 전부 여섯. 이 세상의 노동과 수고를 요구하는 날수와 같다. 이들은 마을을 뒤로하고 떠난다. 따뜻한 밥이라도 한 술 얻어먹었을까?
날을 도와 이웃 마을로 옮겨가는 길이다. 버젓한 큰길은 갈 수 없는 신세다. 마을 사람들 눈에 띄었다간 재수 옴 붙었다고 돌팔매를 맞을 테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는 불구자들이 천대를 면치 못하던 시대였다. 발길 드문 뒷길이 오히려 속 편하다. 그러나 뒷길이 노상 그렇듯이 눈 밝은 사람도 마달 위험이 도사렸다. 좁기도 좁지만 가파른 둑방길 좌우로 얼음처럼 차가운 도랑이 흐른다. 자칫 헛발질하는 날엔 영락없이 서리 맞은 배추꼴이 되고 만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속담을 좋아했다. 지금도 세상에서 속담이 제일 흔한 나라다. 브뤼겔은 속담을 붓끝에다 묻혀서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다. 글과 그림의 구별이 따로 없던 때였다. 브뤼겔은 붓으로 어처구니없는 세태를 비꼬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위험한 사상을 말했다. 섭정 시대 네덜란드 사회는 자못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솔직하게 속을 터놓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말 한마디에 진실이 뒤집히고 이웃이 원수가 되기도 했다. 이럴 때 속담 한 마디는 한 잔 술처럼 아픈 생채기를 아물리는 처세였다. 속담은 아킬레스의 창날처럼 상처를 내기도 하고 아물게도 하는 힘이 있었다. 따끔한 교훈과 따뜻한 격려를 한꺼번에 담는 재치가 있었다. 16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은 앓듯이 내뱉는 속담 한 마디에 부끄러운 역사와 말 못할 진실을 담았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는 없다. 주린 이가 주린 이를 채우거나, 병든 이가 병든 이를 낫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불의가 정의를 일으키지 못하고, 거짓이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미움이 사랑을 피워내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다.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건 그림에나 있는 일이다. 전도된 세상, 바보 배를 타고 가는 바보 세상에나 있는 일이다.


마태복음 15장을 보자. 눈먼 길잡이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알고 이렇게 비유를 던진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진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심지 않으신 것은 모두 뽑힐 것이다.”


브뤼겔의 그림은 성서 이야기를 베꼈다. 교회 뾰족탑이 그림 복판에 솟아 있다. 성서의 관점에서 소경은 죄인이다.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으뜸 덕목이 밝은 눈을 가진 ‘슬기’(prudentia)라면, 그 반대말 ‘맹목’은 어리석음(imprudentia)의 표본이다. 소경을 믿고 따르다가는 필경 구렁에 빠지고 만다. 그러니 ‘하나님말고는 아무도 믿지 말아라’는 교훈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속담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거짓 교사를 겨냥한 비난에서 나왔다. 예수는 또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통해서 눈먼 세상을 일깨운 일이 있었다. 16세기 네덜란드는 눈을 뜨게 하신 예수의 기적 이야기를 육탐에 눈멀어 영혼의 눈을 앗긴 ‘눈뜬 소경’에 대한 비유로 바꾸어 읽었다. <이코놀로지아>를 쓴 체사레 리파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기적 이야기는 이 세상 눈뜬 소경들을 인도하는 등불로 해석했다. “내 아버지가 심지 않으신 것은 모두 뽑힐 것이다”라는 예언은 실명의 저주로 읽었다. 소경의 실족은 교회의 등불을 외면하는 이교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브뤼겔의 그림에는 소경 여섯이 나온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서 세상 무대를 건넌다. 첫째 소경이 먼저 웅덩이에 빠졌다. 그가 끼고 다니던 악기도 박살났다. 둘째도 덩달아 비틀거린다. 눈두덩이 움푹하다. 누군가 그의 눈을 후벼팠다. 셋째도 걸음을 가누지 못한다. 눈이 흰자위를 뒤집었다. 흑내장이다. 넷째는 각막백반. 소경 가운데는 나면서부터 신의 은총을 여읜 사람도 있지만, 제가 지은 죄값으로 눈알을 뽑힌 사람도 있다. 셋째 소경은 멈칫하는 순간 교회를 올려다본다. 저 멀리 마을 한복판에 서 있는 교회는 첨탑을 뽐내며 어리석음의 구렁에 실족한 죽음의 행렬을 내려다본다. 넷째 소경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곧 닥칠 일을 보지 못하는 건 눈뜬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경들은 하나같이 엉터리 예언자처럼 지팡이를 들었다. 무지와 거짓은 둘 다 지옥으로 직행하는 무거운 죄악이다. 길 잃은 인도자를 따라서 여섯 소경 모두 끈 떨어진 염주처럼 줄줄이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이다. 구렁텅이에는 일곱 가지 악덕이 우글댄다.


브뤼겔은 소경 여섯을 길게 펼쳐진 넓은 가로 무대에 배치했다. 지평선은 높이 끌어올렸다. 이들은 걸인, 순례자, 나그네 차림이다. 세상의 무대를 지나가는 이들의 행렬은 해골들이 서로의 뼈를 맞잡고 추는 죽음의 무도를 닮았다. 소경들의 머리를 사슬로 묶어 보면 왼쪽 지평선 부근부터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해서 차츰 오른쪽 화면 모서리로 곤두박질친다. 지평선과 소경들의 행렬은 다른 방향이다. 그림 속의 큰 동선을 두 개 끄집어낸다면 지평선과 사선이다. 이 둘은 그림 왼쪽 귀퉁이에서 시작해서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브뤼겔의 그림이 대개 그렇듯이 하늘 꼭지에 눈을 두고 내려다보면,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자기도 모르는 커다란 운명의 수레바퀴에 실려서 서서히 회전한다. 그렇다면 소경들의 비극은 단지 그들의 불행이 아니라 눈뜬 소경들이 타고 있는 바보 배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아니면 섭정기 네덜란드의 암담한 운명에다 성서의 비유를 씌웠는지도 모른다.


그림 왼쪽 아래 귀퉁이에는 마른 관목 한 그루가 을씨년스럽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는 ‘플루토의 나무’ 또는 기독 도상에서 자주 나오는 ‘사망의 나무’다. 반대편 오른쪽 귀퉁이 여울가에는 풀꽃이 한 송이 피었다. 붓꽃이다. 기독 미술은 꽃잎이 칼날처럼 생긴 붓꽃을 덕목의 꽃말로 읽었다. 웅덩이에 빠진 첫째 소경은 팔을 들어 붓꽃을 더듬는다. 사망의 계곡에서 구원의 향기를 맡았다.


그림 밖을 내다보는 이가 있다. 흰 고깔을 쓴 둘째 소경이다. 그는 우리와 눈길을 맞추면서 외친다. 실명의 눈짓으로 삶의 헛된 가치를 증언하고 죽음의 행렬에 따라 붙으라고 초대한다. 브뤼겔은 빛과 그림자를 움푹하게 패인 눈두덩에 고루 발라 두었다. 부재가 존재에 대해 이처럼 사무치는 견인력을 가졌던 적은 드물었다. 성서를 설교하는 그림 속의 안내자가 이처럼 공허한 눈빛을 소유했던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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