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퀴즈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을까요?

어려운 퀴즈가 될 것 같은데요..
저도 답을 못냈습니다. 아직요.. 방금 생긴 질문입니다.

참고구절 마 5:22, 3:7

99.3.30

세번째 퀴즈의 답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저는 상상도 못했는데..
뜻밖의 지혜를 주셔서 답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다른 사람을 욕하면 살인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께서 바리새인등을 부르실 때는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설명으로 무엇이든지 설명가능하지만
그 예외가 과연 성경에 나와 있는 예외 인지가 저에게는 중요했기에..
… 결국은 그것을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비느하스의 질투심입니다.
살인은 죄이지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었고 그는 영원한 평화의 언약인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하나님께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얼마나 놀라웠던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질투심.. 이라면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질투심이냐하는 것은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일
인것 같습니다. 비느하스의 경우에 대해서는 직접 살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또 시내산에서 우상숭배로 더러워졌을 때 레위인들이 그들을 쳐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일도 있습니다.

저같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민수기 25장에 비느하스의 이야기가 있고
출애굽기 32장에 형제들을 도륙한 레위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내린 답변입니다만 역시 부족한 사람인지라
별로 동감하지 않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첫번째 퀴즈

예수님께서 제자들하고 갈릴리 바다를 지나실때
바다는 폭풍이 휘몰아쳐서 다 죽게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주무시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보고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시지요..

그냥 보면 아무 문제 없는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갑자기 위험에 닥친다거나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경우도 믿음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것이 믿음의 행위인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위의 이야기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퀴즈입니다.

———-
99.3.25

뭐.. 정답은 아니고 제가 내린 답입니다.

이건요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깨운것 자기에게 도와달라고 한 것을 가지고
그들을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신 것을 보아

그들이 예수님에게 구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기도는 해야 하지만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겠습니다.

두번째 퀴즈

산상수훈도 자세히 보면 앞뒤가 안맞는거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마 5ㅣ15-16

사람이 등불을 켜서 발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일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
게 비취느니라.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
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을 비취게 하는데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사람 발 아래 두지 말고
등경위에 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도록…

뭔가 발견하셨는지..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
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건 무슨 말입니까? 사람 앞에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는 말인데요..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될까요?
퀴즈입니다.
저도 이건 정확한 답을 못내렸습니다.

99.3.27

이거 몇일 전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말 기쁘네요.

자신이 한 일이 드러나는 것 자체가 상을 못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하셨습니다.
~~~~~~~~~~~~~~~~~

중요한 것은 동기이죠.
드러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나쁜 것이고 상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빛이 마음놓고 비춰질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아니라
6장 17절 말씀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 말씀이 더 어려웠어요.. 그렇다면 저절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도
일부러 감추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련회같은 곳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 목이 쉬잖아요?
그렇게 저절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를 드러낸다면
기도할 때에 목을 아껴가며(?) 기도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6장 17절 말씀은 문맥을 자세히 살펴볼 때에 강조의 의미가 짙었구요
그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결론이 바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목이 쉬어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거 가지고 상이 없고 그러진 않구요

목이 쉬어서 째려고 기도를 목아 찢어져라고 한다면…

–;

상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목이 쉰거 가지고 우리 빛이 사람앞에 비춰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지는 않죠…–;  쩝

선악을 안다?

아담과 하와가 숨은 것은요 죄가 들어와서 그런것이 아니라 벗은 것이 두려워서 숨은 것입니다. 벗은 것이 부끄러워 숨은 것이 아니라 두려워서 숨었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이거 어려운 문제입니다. 7절의 눈이 밝아 자신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치마를 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기 전까지는 그들이 벗은것을 몰랐다는 말이 되죠. 더 보기 “선악을 안다?”

가끔 말씀을 거스르자

막 1:43-45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
거하라 하셨더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만일 내가 그 문둥병자였다면 아마도 그랬겠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고쳐주셨는데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을 아무리 말하고 싶어도 참겠습니다.

나같이 융통성 없는 사람도 있을까?

문둥병자가 나보다는 훨씬 올바르게 보인다.
김진홍 목사님의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책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믿다가 자살한 한 여인을 장례식좀 치러달라고 다녀도
모두가 거부해서 김진홍목사님을 찾아왔는데 자신은 그 사정이 딱해서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나는 그 목사님 같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치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장례를 치러주지 않았을 것이다.
왜 안되는지 말씀으로 증명해 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밝혀 낼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 호주 가시면서 마음이 심란하시고 아버지 이야기좀 들어 보라면서
밤 늦은 시간에 나가서 소주나 마시면서 이야기 하자고 그러셨을때
그냥 이야기 하면 안되냐고 거부했었는데

그래도 나는 믿음을 지켰다고 하고 싶었는데.

김진홍 목사님은 달랐다.

“활빈교회가 창립하고 세 번째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예배중에 소주병이 날아들어와 교회벽에 부딪히더니 깨어져 유리조각이 산산조각이
나고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뒹이어 마을 부량배 여섯 명이 들어와 ‘왜 이리 시끄럽
게 노래부르냐’고 시비를 걸었다. 몇 모였던 교인들은 그들의 험상궂은 기세에 눌려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정중하게 대했다. …(중략)
나는 그날 저녁 저녁예배를 마치고 얼마큼 지난 시간에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사서 ‘이쯤 했으니 가자’고 하던 자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자고 있었다. 깨워서 이야기를 걸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일대일로 마주 앉으면
 약한 데가 있는 법이다.
 오징어를 구워달래서 소주잔을 마주들고 나는 이야기 했다. 내가 왜 이마을에 드어
왔으며 나는 예수를 알기 전에 어떻게 방황했던가, 지금 내가 믿고 있고 전하려 하
는 예수는 어떤 멋쟁이인가등을 차근차근 이야기 하고 예수께서 그에게 해 줄수 있
는 것을 성심껏 이야기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꿇어 앉으며
‘성님, 그런 예수를 나도 믿을랍니다.’ 했다. 나는 ‘고맙다, 그말을 들으니 내가
이렇게 기쁜데 예수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고 했다. 그는 엉뚱하게 자기가
예수믿고 새롭게 살아 보겠다고 면도날을 찾았다. 나는 그럴필요까지는 엇다고 그를
 만류했다.”

그 글을 읽어며 과연 목사가 주일날 술을 권해도 되는가. 의도는 물론 좋지만 잘못
된 방법이다. 이렇게 생각했으나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건지
뒤숭숭해졌다.

오늘 대학부 순모임중에 고침받은 문둥병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금은 확실해 졌
다. 바울의 고백이 생각났다.

9:19-22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
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
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
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이 글만 가지고는 확실하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우연히 읽게된 IVF소책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라는 책에서늬 논증과 같이 주님의 명령의 상위 하위
개념을 분명하게 해서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책에서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은 이야기, 다윗이 진설병의 떡 먹은 이야기 등은
율법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율법 자체의 정확한 이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려고만 생각하
였다.

지난 한주 동안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듣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을
조금 바꾸어 놓으시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