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수채화

– 전혜린

내가 좋아하는 그림에 작은 엽서형의 수채화가 한 장 있다. 얼마 전에 85세로 작고한 헤르만 헤세가 그린 그림이다.
푸른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풀이 엷게 바람에 나부끼는 하안의 언덕, 멀리 보이는 산줄기, 한가운데 파랗게 괴어 있는 호수, 그리고 흰 구름이 화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공간에 한 덩이 떠 있을 뿐이다. 색도 극단적으로 수수하게 눌러서 마치 동양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는 한 포기씩 섬세하게 그린 풀줄기도, 또 소나무를 얼핏 연상시키는 나무도 너무나 동양적이고 무상감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수십 년 동안 헤세는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살았다. 루가노 호와 먼 알프스산 줄기를 바라보면서 화초를 가꾸고 작품을 쓰고 애독자의 편지에 답장을 쓰고(내가 입수한 그림엽서도 그 중에 하나다) 전쟁을 경고하고, 그리고 수채화를 그렸다.
이 수채화는 인쇄되어서 독일 시중에서 판매되고도 있으나 헤세는 그것을 보르는 애독자나 동료 작가들로 뜻을 같이한 사람들에게 선사하기를 더 즐긴 것 같다.
‘이 고담한 그림과 마음속에서부터 감사하며 인사를 보냅니다. 헤르만 헤세’
라는 친필을 보면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더 생생하고 따뜻하게 헤세의 사람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작은 그림은 그만큼 헤세를 말해 주고 있다. 흰 구름(거의 안 보이게 엷게 암시되어 있는)은 언제나 헤세의 크나큰 사랑의 대상이었다. 구름은 안식을 얻을 수 없었던 헤세의 생활이나 사상의 방랑의 상징이었고 어린 시절의 애인 엘리자베드의 상징이기도 했다.
누구나 젋은 시절에 한번은 외었을 그의 시 ‘흰 구름이 하나 높은 하늘에 떠 있듯이 희고 아름답고 먼 엘리자베드’는 너무도 유명한 그의 식귀다. 이 그림의 구름을 보면 언제나 엘리자베드가 생각난다.
멀리 암시되어 있는 알프스 산은 그가 봉우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소년 시절에 요들을 불렀다는 펜타카멘친트가 생각난다. 풀밭이 너무 섬세하긴 하나 문득 슈터펜볼프를 연상시키고 루가노호는 그나 이 지방의 풍물을 넣어서 쓴 작품 ‘클링조르의 마지막 여름’이 그리고 ‘로즈할데’가 생각난다. 그림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무’와 ‘공’을 견디어 나가려듯 꿋꿋하게 서 있는 나무는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시스’, ‘마기스타크네히트’ 등의 구도자 헤세를 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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