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대하여

저는 항상 내 신앙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그러나
그것은 내 신앙이 줄어들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기준이 높아졌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신앙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어떨때는 저의 느낌으로 내가 참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그런 생활을 요즘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그 때만큼 저의 신앙이 뜨거웠던 때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막쪄낸 찐빵같은 그런 열심을 바랄 때도 있지만
지금 나의 감정이 식었다고 해도 나는 더 기쁩니다. 왜냐하면 나의 감정이
식은 것이 나의 믿음이 식은 것을 꼭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시간에 가끔은 눈물을 흘리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더
깊은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된 마음으로 나아가도
눈물이 안나오면 안나오는 것입니다.
나와도 나는 그것이 진실된 예배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마음이 피상적인 것에만 머물렀다면
나의 예배는 나의 감정충족에만 그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은 사람을 헛갈리게 만들고
영적이지 못한 일들을 영적으로 위장하게 만들고
영적인 일들을 영적이지 못한 것으로 만드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감정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감정을 지극히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변하는 것이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보고서도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즉각적으로
발동하여 그 감정을 묵살해 버립니다. 처음 갖게되는 매력은 외모를 보고 사랑하
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묵살해 버립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시간을 두고
그 때의 감정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돌아봅니다.
그러면 조금 지나지 않아 그 감정은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은 아무런 감정이 없을 때 비로소 참된 모습을 드러냅니다.
감정은 사랑을 위장하며 무감각은 사랑의 본질을 보이지 않도록 눈을 가립니다.

감정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실제는 감정과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심장을 나도 갖고 싶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갖고 싶고,
죄를 극도로 미워하는 마음도 갖고 싶고, 영혼을 지극히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지 그런 감정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런 감정을 갖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싶다
는 것은 나의 인격이 나의 사고가 나의 행위 전반에 있어서
그런 모습으로 다듬어져 가고 싶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아무런 감정이 없어도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있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도 나는 죄를 미워할 수 있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도 나는 영혼을 안타까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실제가 변화하고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영원하지 못하고,
언젠가 그 감정이 없어졌을 때 자신에 대한 실망감만을 가져오지만
나의 실체가 변화하였을 때에는 그런 감정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할 때 눈물이 나면 영적인 사람이고
눈물이 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해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이미 십자가는 나의 삶 속에 스며들어
삶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아침이 몇번 일어나면 힘이 들지만
계속적으로 반복하면 저절로 일어나 지게 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서 매일마다 고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나의 생활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져서 아침에 일어나도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을 더 사모합니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번째 퀴즈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을까요?

어려운 퀴즈가 될 것 같은데요..
저도 답을 못냈습니다. 아직요.. 방금 생긴 질문입니다.

참고구절 마 5:22, 3:7

99.3.30

세번째 퀴즈의 답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저는 상상도 못했는데..
뜻밖의 지혜를 주셔서 답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다른 사람을 욕하면 살인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께서 바리새인등을 부르실 때는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설명으로 무엇이든지 설명가능하지만
그 예외가 과연 성경에 나와 있는 예외 인지가 저에게는 중요했기에..
… 결국은 그것을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비느하스의 질투심입니다.
살인은 죄이지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었고 그는 영원한 평화의 언약인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하나님께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얼마나 놀라웠던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질투심.. 이라면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질투심이냐하는 것은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일
인것 같습니다. 비느하스의 경우에 대해서는 직접 살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또 시내산에서 우상숭배로 더러워졌을 때 레위인들이 그들을 쳐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일도 있습니다.

저같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민수기 25장에 비느하스의 이야기가 있고
출애굽기 32장에 형제들을 도륙한 레위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내린 답변입니다만 역시 부족한 사람인지라
별로 동감하지 않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성례주일과 세례

지난 주는 성례주일이었다.
우리 교회에서 스무명 남짓한 분들이 세례를 받았다.
나는 고 1 때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나 회심한 사람이다.
회심 이후로 바로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까 1995년 10월이었다.
오늘 세례받는 내가 네례받던 또래의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참 새로웠고
목사님의 성경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세례문답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도 마음속으로 다시한번 되뇌였는데
고등학교 때 내가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기도에 힘쓰겠다는 고백이 가슴을 찔렀다.
…. 기도에 힘쓰겠습니까?
예..

나는 기도를 잘 안한다. 그래서 올해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솔로몬의 기도와 같은 그런 기도를 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다.

오늘은 성령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세례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었기에
나누고 싶다.

나에게는 막10:38말씀이나 눅 12:50 의 말씀이 참 난해했었는데 뜻밖에
해결을 볼 수 있어서 참 기뻤다.

너희가 나의 받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 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50)

여기서의 세례라는 것은 분명히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라는 단어의 참 의미는 나에게는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책에서 참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

그전에 할례가 세례가 된 것은
할례만 가지고 아브라함의 제자라고 교만에 빠졌던 유대인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 위함의 목적이 있음도 깨달을 수 있었다.
(골 2:11-12)

첫째로 세례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인치는 것이다.
(요 4:1 –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하는 말을..)
(마 28:19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세례를 주고)

두번째로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세례를
받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징할 뿐이다.
(고전 1:13, 마 3:14-15) 위의 난해했던 두 구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깨달아 졌다.

세번째로 세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치는 것이고(롬 4:!1)
마지막으로 세례는 성결케하는 것이다. (행 22:16, 엡 5:26, 요15:3, 히 10:22)

세례가 제자됨을 인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새로왔고
내가 그러한 세례를 아무 생각없이 받았지만 이제서라도 깨닫고 나니
그 의미과 감동이 더 깊어진 것 같다.
나는 예수의 제자로 인쳐진 것이다.

첫번째 퀴즈

예수님께서 제자들하고 갈릴리 바다를 지나실때
바다는 폭풍이 휘몰아쳐서 다 죽게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주무시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보고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시지요..

그냥 보면 아무 문제 없는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갑자기 위험에 닥친다거나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경우도 믿음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것이 믿음의 행위인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위의 이야기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퀴즈입니다.

———-
99.3.25

뭐.. 정답은 아니고 제가 내린 답입니다.

이건요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깨운것 자기에게 도와달라고 한 것을 가지고
그들을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신 것을 보아

그들이 예수님에게 구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기도는 해야 하지만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겠습니다.

두번째 퀴즈

산상수훈도 자세히 보면 앞뒤가 안맞는거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마 5ㅣ15-16

사람이 등불을 켜서 발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일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
게 비취느니라.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
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을 비취게 하는데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사람 발 아래 두지 말고
등경위에 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도록…

뭔가 발견하셨는지..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
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건 무슨 말입니까? 사람 앞에 보이려고 행하지 말라는 말인데요..

두 말씀이 서로 모순될까요?
퀴즈입니다.
저도 이건 정확한 답을 못내렸습니다.

99.3.27

이거 몇일 전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말 기쁘네요.

자신이 한 일이 드러나는 것 자체가 상을 못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하셨습니다.
~~~~~~~~~~~~~~~~~

중요한 것은 동기이죠.
드러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나쁜 것이고 상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빛이 마음놓고 비춰질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아니라
6장 17절 말씀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 말씀이 더 어려웠어요.. 그렇다면 저절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도
일부러 감추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련회같은 곳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 목이 쉬잖아요?
그렇게 저절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를 드러낸다면
기도할 때에 목을 아껴가며(?) 기도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6장 17절 말씀은 문맥을 자세히 살펴볼 때에 강조의 의미가 짙었구요
그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결론이 바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목이 쉬어서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거 가지고 상이 없고 그러진 않구요

목이 쉬어서 째려고 기도를 목아 찢어져라고 한다면…

–;

상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목이 쉰거 가지고 우리 빛이 사람앞에 비춰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지는 않죠…–;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