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이 그림은 너무 많이 봐서 어떻게 보면 지겨운 듯 하지만 생각하며 볼수록 흥미진진한 그림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을 굉장히 고심해서 그렸다고 한다. 그는 해부학에 열심이었는데, 사람의 얼굴과 성격의 관계를 열심히 연구했다고 책에서 읽었던 것 같다. 성격이 어떤 사람은 얼굴이 어떻고… 라는 식으로, 그래서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성경에 있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다 분석하고 그들의 성격을 읽어내고 또 그 성격에 맞는 얼굴을 가진 모델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여기 있는 예수님과 열 두 제자의 그림은 그런 노력들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장면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유원절 전날 제자들을 모아놓고 저녁을 함께 하셨다. 그 때 돌연히 예수님께서 말씀을 꺼내신다.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느니라.”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주여 저입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 것이다.”


그림 속 장면은..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나를 팔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직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는데 일단은 그림의 구도이다. 제자들과 예수님은 식탁 한 쪽에만 앉아있다. 원래는 빙 둘러앉아 있거나 그래야 정상인데 그림 가까운 면쪽에는 아무도 앉지 않은 것이다. 화가는 이런 구도로 보는 이들을 만찬에 함께 앉게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이 그림은 식당에 걸기 위한 것이었다고 들은 것 같다.)


가운데 예수님이 앉아 있는데 후광이 없고 다만 원근법의 소실점이 예수님 머리쪽으로 집중하여서 주목을 주고 있다. 예수님의 두 손을 보면 한 손은 위로 다른 한 손은 아래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 물론 입고 있는 옷의 색도 의미가 있다. 붉은 색은 보혈을 의미하는 듯하고, 푸른색은 고귀한 신분을 의미했던가? 아무튼 ‘서양화 읽는 법’이라는 책을 읽으면 옷의 색의 의미도 자세히 나와 있다.


예수님 바로 오른편은 요한, 두 팔을 벌리면서 설마 저는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 뒤로 손가락을 위로 치켜든 것은 도마라고 한다. 의심이 많기로 유명한… 열 두 제자가 취하는 표즈는 다 제각각 다르며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경이 급하고 불같았던 베드로는 예수님 왼쪽 두 번째 에 그려져 있는데 흰 수염을 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등 뒤로 칼을 감추고 있는 것이 보인다. 누군지 알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모습이다.


유다는? 그는 베드로 바로 왼쪽에 얼굴이 약간 검은 모습… 오른손에는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유다임이 확실하다. 조금은 흠칫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유다와 예수님의 얼굴을 찾느데 굉장히 고민했다고 한다.


어딘가에서 퍼온 글


”’ 레오나르도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여러 형태에서 추함을 탐구했다. 그는 전쟁 장면과 기괴한 것들을 스케치했고, 꽃과 아름다운 젊은이들 옆에 대홍수 장면을 자주 등장시켰다. 레오나르도는 거리에서 신체 불구자나 외모가 이상한 사람을 보면 하루 종일 그를 따라다니며 세세한 점까지 기록했다. 어떨 땐 그 고장에서 가장 기괴하게 생긴 사람들만 초대해 파티를 벌인 적도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히스테리컬한 웃음을 터트릴 때까지 계속해서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파티가 끝나고 나면 파티에 왔던 사람들의 얼굴을 밤을 새워 스케치하기도 했다.


케네스 클라크는 레오나르도가 추함에 호기심을 가졌던 것을 두고 ‘사람들이 고딕식 성당에 괴물 형상의 석누조 조각을 다는 동기’에 에 비유했다. 괴물 형상의 돌 조각은 성자의 상을 보완해주었다. 레오나르도의 기형 인물 스케치는, 그가 끊임없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완해주는 역할을했다.’ ‘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보면 항상 신비스럽게 대하게 되는데 왜냐면 그가 그린 사람얼굴이나 표정 몸짓 하나하나는 굉장한 연구와 정보수집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찾는데 굉장히 어려워서 이 그림에서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의 전형 다빈치… 이 너무나도 유명한 ‘최후의 만찬’ 알고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그림이다.

오토 딕스, ‘세례 받으심 (The Baptism)’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세례를 주는 요한의 모습이 굉장히 특이하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준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의 의미는 어떠했나.
비둘기 같이 임하는 성령, 그 밑에 세례요한의 큰 손, 그 밑에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짐작건대 왼쪽 위에 몇 번의 쏟아지는 터치는 하늘에서 들린 하나님의 음성인 듯 하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세례요한은 세례를 줄 때 성령이 그 이에 머무른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인물로 알았다.
그의 손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는 삼각형 모습으로 마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암시하는 것만 같다.

베르메르,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House of Mary & Martha, 1654-55,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베르메르 –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654-55년경, <위>

그림의 내용은 예수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했을 때를 묘사하고 있다. 언니 마르다는 식사준비로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께 나가, 마리아가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 주께서는 이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10장 41~42)
이 이야기는 당시 네덜란드, 플랑드르, 이태리에서 유행했고. 특히 플랑드르에서 인기있는 주제였다고 한다. 베르메르는 이 주제를 그린 플랑드르 그림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특히 안트워프 화가 Erasmus Quellinus의 작품과 유사성을 지닌다.<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베르메르와 Quellinus의 작품은 같은 주제이지만 내용은 다르다. 베르메르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같은 비중을 두었고, 그것은 굉장히 마르다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칭찬하시고 불평하는 마르다를 나무라셨다. Quellinus의 그림을 보면 그 느낌이 온다. 마리아는 예수님 곁에서 둘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반면 마르다는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구원을 얻는 두가지 방편을 상징하고 있다.
마리아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는 것임을 상징하고 마르다는 구원을 얻는 방편으로서 행위를 상징한다.

Quellinus는 마르다는 그림의 중요인물에서 제외시켰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구원은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의 모토였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그는 개신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미술에는 그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이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후에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동일하게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카톨릭은 믿음과 행위의 적절한 조화를 강조하였다.

어찌보면 카톨릭의 이러한 사상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히 논증하듯이, 의롭다함을 받는 방편으로서, 율법과 행위가 중요시 된다면 그리스도는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되며, 우리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이 믿음은 참된 자유를 가르쳐준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얼마나 강조하였는지 모른다.

그림 속에 당시 종교개혁의 두 교리가 다르게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굉장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오토 딕스,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리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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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딕스가 그린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평범하다. 어찌보면 파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그는 기존의 우아한 예수님의 그림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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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두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또 이 어린아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까.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실망을 했을지도, 어쩌면 반대로 큰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저 표정을 보면 무언가 섭섭한 표정들이다. ‘너정도면 천국에서 큰자다.’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일까.


어린아이의 표정을 보자. 어린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내가 보기엔 저 어린아이는 자기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던 작은 자가 되던 별로 관심 없다는 표정인 듯하다.
자기가 왜 여기 서있는지 예수님께서 왜 부르셨는지 잘 모른다.


둘의 마음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The Artist’s Studio, 1665, oil on canvas, Kunsthistorisches Museum at Vienna


이런 그림을 알레고리화라고 한다. 그림의 사물마다 의미를 담고 있는 그런 종류의 그림 말이다.
이 그림에서 베르메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화가란 어떤 사람인가?’

소녀가 보인다. 한 손에는 나팔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었는데 이런 모습을 한 여인을 ‘역사의 뮤즈’라고 한다. 이 책은 투키디데스의 책이며, 월계관을 쓰고 있으므로 ‘명성’을 상징한다.

책상에는 가면이 보이는데 이것은 모방을 의미한다.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그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를 그리며

화가는 그림을 순서없이 월계관먼저 그리고 있다. 이는 화가의 의도를 나타내는데 한번 들은 설명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커튼은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베르메르는 다른 그림은 다 팔았어도 죽을 때까지 이 그림만은 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야망이 담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