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딕스, ‘천국에서 가장 큰 사람’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리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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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딕스가 그린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평범하다. 어찌보면 파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그는 기존의 우아한 예수님의 그림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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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두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또 이 어린아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까.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실망을 했을지도, 어쩌면 반대로 큰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저 표정을 보면 무언가 섭섭한 표정들이다. ‘너정도면 천국에서 큰자다.’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일까.


어린아이의 표정을 보자. 어린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내가 보기엔 저 어린아이는 자기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던 작은 자가 되던 별로 관심 없다는 표정인 듯하다.
자기가 왜 여기 서있는지 예수님께서 왜 부르셨는지 잘 모른다.


둘의 마음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The Artist’s Studio, 1665, oil on canvas, Kunsthistorisches Museum at Vienna


이런 그림을 알레고리화라고 한다. 그림의 사물마다 의미를 담고 있는 그런 종류의 그림 말이다.
이 그림에서 베르메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화가란 어떤 사람인가?’

소녀가 보인다. 한 손에는 나팔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었는데 이런 모습을 한 여인을 ‘역사의 뮤즈’라고 한다. 이 책은 투키디데스의 책이며, 월계관을 쓰고 있으므로 ‘명성’을 상징한다.

책상에는 가면이 보이는데 이것은 모방을 의미한다.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그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를 그리며

화가는 그림을 순서없이 월계관먼저 그리고 있다. 이는 화가의 의도를 나타내는데 한번 들은 설명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커튼은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베르메르는 다른 그림은 다 팔았어도 죽을 때까지 이 그림만은 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야망이 담긴 작품이다.

오토 딕스, ‘승리의 입성’


저것이 승리인가. 승리자의 표정인가. 당나귀는 왜 저리 조용히 눈을감고 침묵을 지키고 있나.


군중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고 환영하고 있나. 종려나무 가지는 왜 흔들고 있나.
그들이 외치는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는 무슨 말인가.


다윗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 되어서 자기들의 적들을 처부숴 달라는 주문이었겠지.


그러나 그들의 적은 로마도 다른 이방 족속들도 아닌 것을.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진정한 적. 죄, 율법,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주시기 위해 그들 대신 그 저주를 받으신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까닭은 죽기 위하심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다윗왕 시대의 그 강성하던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을테니.


그래서 저들은 순식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살인마로 돌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Henri Nouwen


“고흐만큼 나에게 영향을 준 작가나 화가가 없었다. 깊은 상처의 사람, 놀라운 재능을 가진 고흐는 나 자신의 아픔과 재능에 다른 사람이 줄 수 없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흐는 나의 전 생애의 영적 인도자로서 나의 영적 생활을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고흐야 말로 신학적 성찰을 위한 참된 근원이 됨을 발견하도록 한 것이다. 고흐는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 뿐 아니라, 삶의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다. 그의 그림은 마음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고, 고흐는 언제나 한 목회자로 남아서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그가 회개를 촉구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이 사실이 바로 고흐의 그림이 지닌 깊은 우주적 호소력일 것이다. 고흐는 사람의 실패와 고난과 기쁨, 그 모든 것을 겪었고 또 그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그의 그림 속에 모두 표현했다.”

 – Henri Nouwen

루벤스, ‘십자가에서 내림’


The Deposition, 1612, oil on wood, Antwerp Cathedral


렘브란트의 십자가에서 내리는 그림과 비교해서 보면 재미있다. 그림의 내용도 같고 시점도 비슷하지만 좀더 클로즈업 되어 있고, 루벤스 답게 색이 풍부하다.


남자의 붉은 옷과 흰 두루마기가 눈에 확 드어온다. 붉은 옷은 마치 흘러내리는 보혈을 상징하는 듯하다. 예수님의 몸의 묘사는 매우 건장한데 이것은 또한 한스홀바인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좋다.


그가 이렇듯 건장하게 그린 것은 그저 아름다운 육체의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이고, 주제는 그 목적을 위한 도두였던 것 같다. 그림의 주제보다는 대각선 구도나 육체표현 등의 미술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라고.. (아는 것은 없지만) 마치 그렇게 보인다. 램브란트나 한스홀바인의 그림보다는 감동은 덜하다. 하지만 흰색과 붉은 색의 대비는 아주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그림은 어쨌거나 비통한 그림이며, 여인들의 표정묘사도 그렇다. 그리스도의 표정은 완전히 지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