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보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이 구절의 주해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전에 바로를 정복하셔서 그 군대를 깊은 바다에 소장시킨 것처럼 모든
죄악을 자비로 정복하시고 깊은 바다에 던지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바다와 같다.”(Starke)’
이스라엘 앞에 버티고 있던 큰 바다…
그 바다 가운데로 그들은 지났으나..
쫓아오던 애굽 군대는 몰살당했다.
나를 쫓아오던 그 군대는 어디로 갔는지.
나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던 것처럼
죄에 종노릇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는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났고
그 바다는 쫓아오던 죄까지 삼켜벼린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
참으로 기막히고 감사한 일!
주께서 애굽 군대를 바다에 수장하셨듯이
나를 쫓아오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던지셨으니!
보라 하나님 구원을
보라 하나님 능력을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는
주의 손을 보라!
로마서 공부하던 흔적
1.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 것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에 이르렀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믿어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
우리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
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2. 구약시대에도 믿음으로 의에 이르렀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구약시대에도 이방인에게 구원이 있었다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지 율법을 폐하시고 완성하신 것, 성령이 주어진 것 이외의 의미가 있는가?
특별히 우리가 구원받는 문제에 있어서 예수로 말미암아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
3. 의의 종이 된 후에 다시 육신대로 사는 것은 바울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지 고의성의 존재
여부에만 관심을 갖는 것일까?
… 머리속은 정말 복잡하다.
세상 끝 날에 나타나심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심판날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 끝날에
나타나셨느니라라고 과거로 되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잘 몰라서 히브리서 1장부터 차근차근 읽다가 1장 2절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라고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들은 예수그리스도시고, 이 모든 날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1절의 선지자
들에게 여러 방법과 모양으로 말씀하신 것의 마지막 – 왜냐하면 그 뒤로는 아들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 을 말하는 것인 것 같다.
같은 의미에서의 세상 끝과 모든 날 마지막은 아닐까한다.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세상 끝날이라는 표현이 항상 예수의 재림
의 때, 심판의 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분명히 초림의
때를 말하고 있다.
감사하며 사는 것
감사하며 사는 것은
마치 오늘 눈을 뜬 소경처럼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고
마치 오늘 처음 걷게 된 앉은뱅이처럼 세상 위를 걷는 것이고
마치 오늘 처음 듣게 된 귀머거리처럼 세상 소리들을 듣는 것이고
마치 태어나서 밥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같이 주어진 음식을 먹는 것이고
마치 어둔 감방에서 수십년을 살다 나온 사람처럼 하늘을 보는 것이고
마치 어제까지 고아였던 사람처럼 부모님을 대하는 것이고
마치 어제 죽을뻔하다 살아난 사람처럼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또,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오늘 눈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고
오늘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인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고
오늘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인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고
오늘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고
어둔 감방에서 수십년째 지내오고 있는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이고
부모없는 고아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는 것이고
오늘 당장에 죽을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을 때 마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변론, 논쟁, 토론, 어리석은 것인가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딛 3:9)
변론과 논쟁, 그 자체는 어리석은 것이며 피해야하는 것인가?
얼마전 대순진리회 사람과 진리에 관해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아.. 이것이 어리석은 변론이구나
생각했으나 마음깊이 받아들일 순 없었다.
여전히 진리는 찾아야하며 이단같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공격을 당하면
그저 피할 것이 아니라 맞서서 진리를 사수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진리가 있을지 심각하게 성경적 기반위에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따져봐야한다고 여겼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예를 들면 담배, 술을 해야하느냐? 같은 문제로
다른 사람과 의견이 다를 경우 자기 주장을 펴고 끝까지 다른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변론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 아닌가? 생각해왔다.
하지만 가끔 토론이 싸움으로 번지고, 이단과의 논쟁에 휘말리는 모습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의 디도서 말씀과 디모데 전후서에 걸쳐서 나타나는
어리석은 변론에 관한 이야기는 변론 자체를 하나님께서 반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주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탁명환 같은 이단을 파헤치고 연구하던 분
도 존재할 수없을 것이고 토론을 통한 의견교환같은 것도 불가능한 것 아닌가
생각해왔고 변론을 잘 하지 못해서이지 변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 구절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위 구절을 볼 때 이 구절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과 쓸데없이 변론하지 말아라
는 뜻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깊이 본 결과 이 변론을 피하라는 말은 그들과
맡서 싸우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처럼 변론을 펴서 진리를 거스르지 말아라는 뜻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변론을 피하라는 것은 그들처럼 그들의 편에 서서 진리를 대하여
변론하지 말라는 뜻인 것이다.
디모데 전서 1장 말씀이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 1:3-4)
변론이 진리와 싸울 때 나오는 변론을 뜻하지 않고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할 때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3장에서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13,16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오히여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을 인하여 경건의 비밀과
바른 말씀을 계속하여 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6장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서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3-4절)
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른 교훈을 할 때 변론을 내고 싸움을 걸고 악한 생각
이 나게 된다는 것이지 그 다른 교훈하는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말씀으로 맞설
때 변론이 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20-21절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확실해 진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변론을 피하라는 말씀은 변론을 하는 사람들을 좇지 말라, 그들과 한패가 되지
말라.. 이런 뜻이다.
디모데 후서 말씀에서도 디모데에게 진리를 옳게 분변하여 귀히 쓰임받는 사람
이 되고 말씀을 잘 가르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22-23)
이 구절이 조금 어려웠으나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청년의 정욕은 성적 정욕으로 볼 수도 있으나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은 죄에서의 깨끗한 마음으로 볼 수도 있으나
전후문맥으로 볼 때(이 말씀 전에는 귀히쓰는 그릇 비유가 나옵니다.
제 글 귀히쓰는 그릇(4) 를 참고하시면 깨끗하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깨끗하다는 말씀은 온전한 진리위에 서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는 것은 진리에 회의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다
받아들이지 말고 특히 변론하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는 뜻으로 보아야한다.
그래서 의와 믿음과 –> 바른 교훈위의 믿음
사랑과 화평 –> 변론을 통해 싸움을 걸거나 투기하지 않는 것
을 좇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는 것은
그들과 같이 진리를 대적하여 다툼이 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다툼은 그들과 맞설 때 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진리를 대적할 때
다툼이 나는 것이라고 이미 살펴보았다.
이미 16절에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네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
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버려야하는 망령되고 헛된말은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과 논쟁을 벌였을 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후메네오와 빌레도를 보면
그들은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과 싸운 사람들이 아니다. 바로 진리를 거스린
자들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과 쓸데없이 논쟁하지 말라
는 뜻으로 볼 것이 아니라 후메네오와 빌레도 같이 진리를 거스리는 헛된 말을
하지 말아라는 뜻으로 보아야 옳다.
3장에서는
저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4장에서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권하라… 라고 한다.
이것은 진리를 거스리는 자를 피하고 도망가라를 말씀과 반대로
그들을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권하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그 밖의 서신들을 통해서
할례에 대해서 제사에 대해서 또는 여러가지 교리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논쟁하고
자신의 입장을 변론했고 이 같은 사실은 사도행전에서도 나타난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9:28-29)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행 18:18-19)
우리가 피해야할 것은 모든 변론이 아니라 어리석은 진리를 거스리는 변론이다.
교회 목사님들이 가끔 여호와의 증인 갚은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피해라.. 뭐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그런 것은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함이지
강한 믿음위에 선 사람들은 오히려 진리를 바르게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할 것
이다. 아무튼 성경은 모든 변론, 논쟁을 피하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반대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