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쯤? 학교에서 소그룹모임 발표용
십자가의 의미
지금으로부터 약 이천년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나는 나의 죄에서 해방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게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는 죽어있었다. 내 영은 이미 사망의 상태였고 구원의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분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속량하셨다. 나는 죄의 법 아래서 죄와 율법의 종이었지만 예수께서 당신의 피 값으로 나를 사셔서 자유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 나의 죄가 더 이상 나를 하나님에게서 가로막지 못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던 많은 장애물들이 그의 십자가 아래서 다 제거되었다. 나는 죄를 지어도 담대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사단의 참소에도 이겨낼 수 있다.
두 번째로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비로소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주셨다는 그 기가 막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그와 그의 독생자를 찬양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나의 마음속에 가질 수 있으며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그것을 찬미할 수 있게 해 준다. 구원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께서는 만민으로 그의 백성을 삼기 원하신다는 것을 십자가위에서 증명하셨고 그리하여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더라도, 할례가 없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놀라운 일이 그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고 그의 십자가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평화를 전하였다.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를 머리로 통일된 것이다. 그 놀라운 경륜을 깨닫고 찬양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예수의 십자가는 나에게 회개와 순종을 요구한다. 나의 죄로 인해 그 분께서 못박히셨다면 나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깨달을 때 참으로 회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죄로 인해 못박히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로 그의 십자가는 나에게 겸손과 섬김을 요구한다. 내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그의 오신 이유는 십자가를 위함이었으며 그의 모든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함 그 자체였다. 자기의 형체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지시고 죽기까지 하나님 뜻에 복종한 그의 삶은 나에게 큰 도전을 주며 다른 누구의 삶보다도 나의 삶의 목표로 삼을만하다. 그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는 것이 필요했다. 나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할 만한 이가 있다면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신 것이다. 그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하셨기에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온몸과 발끝까지 씻기신 그 분을 볼 때에 나도 다른 이를 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끝으로 그의 십자가는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빚진 자의 비유는 내가 진 빚을 천부께서 다 탕감하여 주었는데 나는 왜 다른 사람에게 조금 빌려준 것을 갚으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위에 죽이심으로 나의 죄를 사하심과 같이 나도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하여 주어야한다는 말이 아닌가. 산 위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이 기도를 가르쳐 주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참으로 그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끝임 없이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이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꼐 맡긴다는 것은
이 일은 내가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더 잘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겼다고 해서 내가 해야할 일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일을 맡기지 않는다면
그 일은 성공해도 스스로 내가 이루었다고 교만해지므로 결국은 실패요.
그 일이 실패한다면 스스로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결과이므로 실패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일을 맡긴다면
그 일이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그 일이 실패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일을 해야하는 나의 책임을 하나님께 모두 떠넘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 일을 열심히 행하고 난 결과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면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긴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꼐 맡길 때
그 일의 노력의 책임은 나이지만
그 일의 결과의 책임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불신과 맹신
불신 –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믿지 못하는 것.
맹신 – 믿을 만한 이유가 없는데 막무가내로 믿는 것
불신도 참 신앙이 아니고
더 중요한 사실,
맹신도 참 신앙이 아니다.
참 신앙은 믿음에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흔들림 없이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 배로 오셨다.
그 배 위에 있던 제자 베드로,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게 하소서.”
“오라!”
그 때,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마 14:28-29)
베드로는 처응부터
‘주님 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야고보서 새롭게 보기
야고보서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함이니라
(3절) 라고 나와있는데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 정욕으로 쓰기위해 구하는
것은 하나님게서 주지 않으신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과연 무엇이 정욕일까.. 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여기서 정욕은 1절의 싸우는 정욕과 연관지어야한다고 느꼈습니다.
앞부분부터 인용해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쫓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
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
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
니라(4:1-3)
저는 여기서 그들이 구하는 것을 지혜로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번째로 야고보서 1장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씀때문이고
3장 13절 이하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 이요
마귀적이니…(3:13-15)
라는 말씀이 뒷받침 해 줍니다.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수신인의 상황은
(아마 3장 초반에서 언급된 선생들.. 이라 여겨집니다.)
서로 자기 지혜와 총명을 뽐내고 싸우고 시기하고 다투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으로 난 지혜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기자가 말하려는
지혜는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17)
그들은 서로 선한 열매도 없으면서 자신의 지혜를 뽐내기에만 급급해
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4장으로 연결되어
너희중에 싸움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 바로 싸우는 정욕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서로 싸워서 지혜로운 자가 되려하나 능히 그런 방식으로 지혜를
얻지 못하니 너희가 얻지 못함은 하늘로부터의 지혜를 구하지 않기때문이다
구하여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은 받아봐야 서로 싸우고 잘난체 하는데
쓸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해석했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3절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함
이니라.. 라는 말씀은 자기에 필요만 생각하여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주시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가 되려고 구한다고해도
너희가 싸우고 잘난체 하려는 목적이라면 받지 못한다.. 는 말씀으로
해석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원래 자기의 쓸것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욕.. 으로 쓰려고 구하면 잘못이다.. 라고 가르치는 것은
어디까지가 정욕인지 .. 애매모호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했지만
하실수 있다면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셧고..
바울도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그의 몸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다윗도 자기 아들이 죽을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
그를 살려달라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 구할 수 있는 것
우리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필요에 따라 구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 아닐까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요구, 필요대로 구하는 잘못이 아니라
그걸 받아서 잘난체 하려고 다른 사람들 시기하고 다투기 위해서.. 구하는 것을 뜻?
求?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비슷할지 모르지만 상당히 다르지요..
예를 들면 어떤 좋아하는 자매와의 관계를 위해서.. 구하는 것..
죄악시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흔히 정욕으로 치부해버리고 기도하면 안될것 같지만 자신이 원하는대로 구하는 것?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것 아닐까요?
다만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잘난척하기 위해 방언 통역의 은사를 구한다.. 같은것은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응답 많이 받았다고 째기 위해서라든가.. ^^
그것이 야고보서 말씀의 뜻은 아닐까 합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읽을 때에 이런 배경을 생각하고 읽으면 말씀 한구절한구절이 새롭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이 수신인의 상황이 서로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고 싸우고 있지만 진정한 선행으로써
보여지는 지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지혜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행위로 믿음을 보이라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행함이 강조되는 이유가 그래서일겁니다.
행함없이 진정한 지혜, 믿음을 내세우고 서로 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태복음=출애굽기?
예수님 가족 애굽으로 피신하다
-> 야곱의 가족 애굽으로 가다.
예수님 가족 애굽에서 떠나다.
-> 이스라엘 민족 출애굽하다.
헤롯 아이를 죽이라고 하다
-> 바로 아이를 죽이라고 하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시다.
-> 이스라엘 민족 홍해를 건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시다
-> 이스라엘 민족 광야에서 40년 보내다.
예수님 첫번째 시험 떡덩이를 만들라고 하다.
-> 이스라엘 민족 만나를 달라고 하나님 시험하다.
예수님 두번째 시험 성전에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하다.
-> 애굽 백성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다.
예수님 세번째 시험 사단에게 절하라고 하다.
->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버리고 우상숭배하다.
예수님 시험을 이기시다.
-> 이스라엘 백성 시험에 넘어가다.
예수님 산에 오르셔서 가르치시다.
->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가르치시다.
오늘 마태복음을 본 내용입니다.
재밌습니다.
애굽은 실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성공하셨습니다.
모세는 옛계명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