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1590-1610, oil on canvas,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이삭의 희생은 중세시대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노인, 어린아이, 동물(양), 천사가 함께 들장하고, 그들의 심리가 각각 제각각이어서 화가의 재능을 시험하는 도구라고 들은 것 같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인물의 내면 심층이 드러난다. 이삭은 고통스런 표정을 하는데, 이는 카라바조라는 사람 자체가 워낙 사실주의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지, 안그랬으면 이삭은 기도하는 모습으로 후광이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삭의 표정은 카라바조 만의 것이다.


그래도 아브라함의 표정은 굉장히 이상적이다. 저 단호한 눈빛은 천사가 나타난 후에라도 ‘방해하지마’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머리를 내민 어린양의 모습은 겸손하기 짝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그 뒤로 보이는 건물은, 굉장히 밝은 빛으로 휩싸여 있으며,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영원한 도성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아브라함의 믿음, 그의 믿음은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 천사는 양을 직접 가리키지 않고 중간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이는 양과 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영원한 성을 모두 가리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이삭의 순종은 조금 부각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아브라함과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구한 도성을 감동깊게 드러내었다고 생각한다.

카라바조,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 Santa Maria del Popolo, Rome

젊은 청년 바울, 굉장히 특이하면서, 난 이 그림이 바울의 회심을 굉장히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바닥에 납작하게 그려진 바울의 구도와 그 위에 쏟아지는 빛, 감고 있는 눈, 마치 상상처럼 펼쳐지는 그의 사도로서의 미래.

말, 마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바울과 나는 알고 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을 대의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의 심리를 표현하려면 아마도 저런 무표정이 다른 것들보다 제격일 것이다.

위로 쭉 뻗은 양팔은 표정과 굉장히 대조적이다. 그는 표정이 변하지 않는대신 두 손으로 놀라움과 감격, 충격을 말하고 있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The Ambassadors, 1533, National Gallery at London.

그냥 보면 얼굴 비슷한 (흡사 쌍동이 같기도 한) 두 사람의 초상과 같죠. 제목을 보아하니 무슨 대사인것 같고요.
그리고 뭐 특별한 것이 보이나요?

하지만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화가의 깊은 사색과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답니다.

여기 그려전 사람들은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란 사람인데요. 굉장히 유명한 실력자들이라고 합니다. 교양있고 젊은, 25, 29세의 대사들.

젊은이들은 장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죠. 왼쪽은 영국에 파견된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 29세,(그림을 자세히 보면 복장과 글씨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의 성직자의 옷차림은 조르주 드 셀브, 저명한 학자이자 주교, 25세.

가운데는 2층으로 된 탁자가 있는데요 어떤 것들이 보이나요?
무슨 지구의, 악기.. 이런게 눈에 띄는데요.. 이건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건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서양화는 의미없이 그려진 것이 없어요. 지나가는 개 한마리도 의미가 있죠.)

먼저 2층에 있는 것은 천상계와 관련된 것을 의미합니다. 천구의, 사분의, 해시계 등… 이건 종교적인 의미하고도 연관이 되죠. 오른쪽에 있는 성직자와 연관 지을 수 있습니다. 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기 위한 그림 상의 도구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1층 탁자에 있는 것은 세속적인 것들, 과학과 관련된 컴퍼스, 악기(서양화에서 악기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발달된 예술과 과학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왼쪽에 있는 망원경을 든 사람과 연관지을 수 잇는 것들입니다. 여기 또 왼쪽에 있는 책은 수학책이구요.

그리고 그림을 보면 어색하게 아래쪽에 희고 길다란 물체가 있는 것이 보이는데요.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이건 아주 정밀하게 그린 ‘해 골’ 입니다.
이건 서양화에서 원근법을 표현하는 과학적 방법이 개발된 이후에 가능해 진 건데요. 변형 투영법이란 걸 사용해서 아주 정밀하게 그려진 것이죠. 옆으로 그림을 눕혀서 보면 해골이 보입니다. 이걸 왜 그려놨을까요?
‘화가의 저주?’ 헉.. 화가가 이 사람들을 싫어해서 ?

그런 건 아니고요.
서양화에서 해골은 ‘죽음’ ‘인생무상’을 의미해요.
마치 그림자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그려져 있는 의도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들(두 명의 대사들)에게 자신들도 모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해골과 겹쳐있는 악기의 줄이 자세히보면 끊어져 있어요(여기서는 확인이 안됨) 그건 갑작스런 죽음을 암시하는 거라고 합니다.

두 명의 대사들은 유능하고, 젊고 세상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아주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빼놓을 것 없는 갖출 것 다 갖춘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죽음의 문제는 드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깊이있게 눈여겨 보지 않는한 눈치챌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홀바인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도 그림속에 제시하였습니다.
그건 배경에 커튼 뒤로 살짝 보이는 은색 십자가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아주 서운하지만 왼쪽 위 구석진 부분 – 커튼이 살짝 걷어진 부분- 에 있습니다.)

서양화에서 커튼은 감추는 것을 의미하고 커튼을 치우는 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유능한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처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은 여전히 감추어진 비밀 – 십자가라는 의미입니다. 화가는 이 두 사람의 초상화를 의뢰받고 이러한 생각들을 하고 이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기에 빼놓을 것 없는 유능한 젊은이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부족할 것이 없어보이는 그들에게도 죽음이라는 문제가 있고 그 죽음 앞에서 그들이 가진 것들은 다 무의미하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그들 뒤에 감추어진 것이다.

이 시대는 찬란한 선진 과학을 만들어 냈고 이루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서는 안된다.’

아주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화가의 이런 생각을 읽어가며 그림을 보는 것 아주 재밌는 일이죠.
이런 신앙이 투철한 화가들의 그림의 내용을 읽고 감상하면 그냥 사진하고 다를 것 없는 그림들에게서도 진한 감동이 배어져 나온답니다. 그냥 그림만 보면 다 눈으로 보고 본대로 사실 그대로 화가는 아무 생각없이 따라 그린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그림은 화가의 생각, 화가가 그림속에 담고자 하는 의미에 따라 재구성된 또하나의 세계입니다.

Shepherdess with Her Flock 1864 Oil on canvas


글쎄, 이 그림이 주는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가로지른 지평선, 구름 사이로 비추는 태양의 빛,


소녀의 시선과 그 소녀를 따르는 양무리…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대자연 속에 소박한 일거리와 함께 살아가는 한 소녀의 모습이 웬지모를 깊은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