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1590-1610, oil on canvas,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이삭의 희생은 중세시대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노인, 어린아이, 동물(양), 천사가 함께 들장하고, 그들의 심리가 각각 제각각이어서 화가의 재능을 시험하는 도구라고 들은 것 같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인물의 내면 심층이 드러난다. 이삭은 고통스런 표정을 하는데, 이는 카라바조라는 사람 자체가 워낙 사실주의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지, 안그랬으면 이삭은 기도하는 모습으로 후광이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삭의 표정은 카라바조 만의 것이다.


그래도 아브라함의 표정은 굉장히 이상적이다. 저 단호한 눈빛은 천사가 나타난 후에라도 ‘방해하지마’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머리를 내민 어린양의 모습은 겸손하기 짝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그 뒤로 보이는 건물은, 굉장히 밝은 빛으로 휩싸여 있으며,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영원한 도성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아브라함의 믿음, 그의 믿음은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 천사는 양을 직접 가리키지 않고 중간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이는 양과 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영원한 성을 모두 가리켜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이삭의 순종은 조금 부각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아브라함과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구한 도성을 감동깊게 드러내었다고 생각한다.

렘브란트, ‘이삭의 희생’


The Sacrifice of Isaac, 1635, oil,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손에서 칼이 떨어지는 찰나를 잡은 숨막히는 듯한 그림. 이 그림은 양이 없는 것이 또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삭이 대단히 크게 부각되고 있다. 크기도 크고 모든 빛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다. 어쩌면 렘브란트는 이삭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찾아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는 단호했다. 100세가 되어서 낳은 자식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아까와 할 줄을 몰랐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서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으로 믿었다. 나는 여기 아브라함의 표정에서 그 마음을 또 읽어낸다.
얼굴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 렘브란트의 손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단호함과, 그래도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부정(夫情)을 동시에 느끼게 해 주는 것만 같다.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Art History Museum, Vienna

역시 굉장히 유명한 그림이지만 내가 본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둘의 표정은 생생하다.

골리앗의 머리는 죽은 머리이지만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 같고, 먼 곳을 응시하는 다윗의 표정은 단호하지 짝이 없다.

지금 보니 칼의 크기가 골리앗의 것으로 보기에는 조금 작지 않나 싶다. 마치 다윗을 위한 칼 같다.
책에서 보기로 이 골리앗의 얼굴은 화가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화가는 그림 속에서 자기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벤 다윗은 바로 화가의 어릴 적 자화상

카라바조는 뭘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별 이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기 과거의 현재의 두 자화상을 한 그림에, 그리고 과거가 현재의 자아를 죽이는 내용으로 그래낸 것은 무척 특이한 발상이라 생각한다

한스 홀바인, ‘대사들’


The Ambassadors, 1533, National Gallery at London.

그냥 보면 얼굴 비슷한 (흡사 쌍동이 같기도 한) 두 사람의 초상과 같죠. 제목을 보아하니 무슨 대사인것 같고요.
그리고 뭐 특별한 것이 보이나요?

하지만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화가의 깊은 사색과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답니다.

여기 그려전 사람들은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란 사람인데요. 굉장히 유명한 실력자들이라고 합니다. 교양있고 젊은, 25, 29세의 대사들.

젊은이들은 장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죠. 왼쪽은 영국에 파견된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 29세,(그림을 자세히 보면 복장과 글씨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오른쪽의 성직자의 옷차림은 조르주 드 셀브, 저명한 학자이자 주교, 25세.

가운데는 2층으로 된 탁자가 있는데요 어떤 것들이 보이나요?
무슨 지구의, 악기.. 이런게 눈에 띄는데요.. 이건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건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서양화는 의미없이 그려진 것이 없어요. 지나가는 개 한마리도 의미가 있죠.)

먼저 2층에 있는 것은 천상계와 관련된 것을 의미합니다. 천구의, 사분의, 해시계 등… 이건 종교적인 의미하고도 연관이 되죠. 오른쪽에 있는 성직자와 연관 지을 수 있습니다. 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해주기 위한 그림 상의 도구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1층 탁자에 있는 것은 세속적인 것들, 과학과 관련된 컴퍼스, 악기(서양화에서 악기는 세속적인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발달된 예술과 과학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왼쪽에 있는 망원경을 든 사람과 연관지을 수 잇는 것들입니다. 여기 또 왼쪽에 있는 책은 수학책이구요.

그리고 그림을 보면 어색하게 아래쪽에 희고 길다란 물체가 있는 것이 보이는데요.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이건 아주 정밀하게 그린 ‘해 골’ 입니다.
이건 서양화에서 원근법을 표현하는 과학적 방법이 개발된 이후에 가능해 진 건데요. 변형 투영법이란 걸 사용해서 아주 정밀하게 그려진 것이죠. 옆으로 그림을 눕혀서 보면 해골이 보입니다. 이걸 왜 그려놨을까요?
‘화가의 저주?’ 헉.. 화가가 이 사람들을 싫어해서 ?

그런 건 아니고요.
서양화에서 해골은 ‘죽음’ ‘인생무상’을 의미해요.
마치 그림자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그려져 있는 의도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어요.

‘그들(두 명의 대사들)에게 자신들도 모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해골과 겹쳐있는 악기의 줄이 자세히보면 끊어져 있어요(여기서는 확인이 안됨) 그건 갑작스런 죽음을 암시하는 거라고 합니다.

두 명의 대사들은 유능하고, 젊고 세상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아주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빼놓을 것 없는 갖출 것 다 갖춘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죽음의 문제는 드리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깊이있게 눈여겨 보지 않는한 눈치챌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홀바인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도 그림속에 제시하였습니다.
그건 배경에 커튼 뒤로 살짝 보이는 은색 십자가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아주 서운하지만 왼쪽 위 구석진 부분 – 커튼이 살짝 걷어진 부분- 에 있습니다.)

서양화에서 커튼은 감추는 것을 의미하고 커튼을 치우는 건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유능한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처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은 여전히 감추어진 비밀 – 십자가라는 의미입니다. 화가는 이 두 사람의 초상화를 의뢰받고 이러한 생각들을 하고 이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기에 빼놓을 것 없는 유능한 젊은이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부족할 것이 없어보이는 그들에게도 죽음이라는 문제가 있고 그 죽음 앞에서 그들이 가진 것들은 다 무의미하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그들 뒤에 감추어진 것이다.

이 시대는 찬란한 선진 과학을 만들어 냈고 이루었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서는 안된다.’

아주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화가의 이런 생각을 읽어가며 그림을 보는 것 아주 재밌는 일이죠.
이런 신앙이 투철한 화가들의 그림의 내용을 읽고 감상하면 그냥 사진하고 다를 것 없는 그림들에게서도 진한 감동이 배어져 나온답니다. 그냥 그림만 보면 다 눈으로 보고 본대로 사실 그대로 화가는 아무 생각없이 따라 그린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그림은 화가의 생각, 화가가 그림속에 담고자 하는 의미에 따라 재구성된 또하나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