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하루

이틀전 청담동 국민은행이었다
그날은 수은주도 한없이 떨던 12월 가장 추운날
다친 발가락은 절뚝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세무서에 갔다가 들른 은행 통장에 입금을 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있었다 내 등을 툭쳤다

조.. 되세요?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하고는

네?

그 때

한 은행을 지키는 늙은 아저씨의 웃는 얼굴이 스크린에 가득 비춰졌다
좋은 하루 되세요~

가슴이 녹았다. 아직 날카로운 칼소리 바람소리 자동차 엔진소리 가득한 왕복 8차선 청담동 도로
쌓인눈 얼어붙어 녹을날 기다리던 차가운 갤러리아 백화점 앞
은행밖으로 절뚝거리는 발을 끌고 나왔다.
가슴에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다.

좋은 하루였다.

이성복, ‘다시, 정든 유곽에서’

1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우리의 하품하는 입은 세상보다 넓고
우리의 저주는 십자가보다 날카롭게 하늘을 찌른다.
우리의 행복은 일류 학교 배지를 달고 일류 양장점에서
재단되지만 우리의 절망은 지하도 입구에 앉아 동전
떨어질 때마다 굽실거리는 것이니 밤마다
손은 죄를 더듬고 가랑이는 병약한 아이들을 부르며
소리없이 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더 보기 “이성복, ‘다시, 정든 유곽에서’”

서점에서 본 그림책들

오늘 영풍문고에 가서 오랜만에 그림책들을 보았는데 전에 보지 못한 아주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어서 그중에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개를 소개하려고 한다..


첫번째 책은 페페,가로등을 켜는 아이라는 책인데.. 어떤 아이가 가로등을 켜는 하찮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의 의미를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페페는 자기에게 맞는 일자리가 없자 가로등을 켜는 일을 하게 되는데 가로등하나씩 켤 때마다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린다. 더 보기 “서점에서 본 그림책들”

이성복, ‘제대병’

아직도 나는 지나가는 해군 찝차를 보면 경례! 붙이고 싶어진다
그런 날에는 페루를 향해 죽으러 가는 새들의 날개의 아픔을
나는 느낀다 그렇다, 무덤 위에 할미꽃 피듯이 내 기억 속에
송이버섯 돋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내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오기도 한다 순지가 죽었다, 순지가!
그러면 나도 나직이 중얼거린다 순, 지, 는, 죽, 었, 다


이성복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 있는 시이다.
마지막 순,지,는,죽,었,다 라는 구절에서 저자가 혼자 죽음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데
다섯개의 콤마가 그렇게 죽음에 대한 충격을 힘있게 그려낼 수 없다..

이성복, ‘그 날’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