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인용된 앙리 푸엥카레의 글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기상학자들이 자신있는 일기 예보를 하는데 그토록 애를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나기라든가 심지어는 폭풍조차도 우연히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식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라고 스스로 여기면서도,
비가 오게 해달라고 날씨가 맑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14[1909], 68~69
본래 내용은 카오스 이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어떤 물리계가 초기조건에 대해 민감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다가
무심결에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 구절을 읽고 순간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기도의 행위와 내용 속에는 늘 인간적인 확률계산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어 보이는지는 다를지 몰라도 과학적인 측면에서라면
즉 내일 비가오는 것이나 몇월몇일에 일식이 일어나는 것이나 같은 인과율의 원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이러한 인과율 너머에서 일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도 물리계 내부의 인간의 이해의 정도에 비례하게 가능성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우리가 내일 비올 확률에 대해서 개기일식만큼이나 확실한 정보로 추측가능하다면 내일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바른 답변을 하려면 신앙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해야한다는
것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언급하실 때에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다.
기도를 할 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삶과 관련된 필요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책임을 지신다고 하셨다. 물론 필요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 속에 인간적인 한계선이 개입될 여지가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의 구절을 보면서
한번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언어표현의 한계성
어떤 내면의 상태를 언어로 표현할 때
언어가 사고를 왜곡하는 이유는 사고가 비언어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 사고는 오히려 언어적이다 –
다수의 사고를 몇개의 언어표현으로 종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똑같이 존재하나 나 이외의 다른 인간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존재의 의미는 변해야 하는 것일까
외부적인 상태에 의하여..?
그러면서 한가지 질문을 해보았다.
내가 만일 그 상황에서 어떤 아름다움 음악을 발견하거나 하늘의 구름의 신비한 모습을
하나 발견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내가 그러한 아름다움을 공유할 사람, 저런 것을 함께 보여
주고 싶은 그런 사람의 존재가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것일까.
아름다움을 즐긴다는 것은 항상 다른사람들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즐기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그렇다면 그 감동이란 어떤 것일까. 인간적인 예술작품을 보며 나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처음에는 그러한 아름다움이란 다른 인간의 노력이나 그들의 감정과 소통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의 의미는 역시 인간들 간의 소통에서 발견되는 것일까.
아니, 나는 인위적인 것 이외에 자연적인 것에서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세계의 조화로움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존재하는 세계는 내게 아름다움
이라는 의미를 보여준다. 나는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그 느낌의 의미
를 잘 모르겠다. 나는 그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공유하고자 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간다.
마치 고흐가 그린 하늘에서 그의 내면을 만나듯이
나는 자연이 만드는 하늘을 보면서 같은 아름다움의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신의 존재를 너무나 가슴 깊이 와닿게 해주는 체험이다.
나는 세계에서 인간적인 어떤 것을 발견한다.
인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아름다움의 감정까지도 자연발생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나는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혹은, 정말로 사랑하는 어떤 사람 앞에서
그 사랑을 어떠한 유전자의 느낌 혹은 다른 생물학적 현상으로 설명하고 싶은지 묻겠다.
탐구
의미를 찾으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미란 무엇일까
‘의미’라는 말의 ‘의미’가 명료해지기 이전에 나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의미’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을까?
축구장에서 골을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축구선수들을 떠올린다
누군가 한 시즌에서 최고 득점을 기록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는 노력했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앞질렀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생의 의미를 일부 빼앗아야 한다.
그렇다면 의미, 즉 가치는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는 정량의 자원이며
인생을 그것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인가..
왜 그것을 얻으려고 하는 거지? 결국 어떤 만족감 같은 것을 누리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을 얻는 순간 삶은 또다시 허무에 빠지지 않는 것인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게임인 축구 골대에 공을 여러 번 차 넣은 행위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은가?
왜 그것을 위해서 수많은 땀을 흘리는 것이지?
그래 그 행위는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다른 사람들은 선수들에게 대가를 지불한다.
하지만 저런 비생산적 게임을 통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왜 즐거움이라는 것을 추구하나.. 생산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진정 생산적이라고 할만한 행위가 있는 것일까?
평균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특별한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까?
사랑이라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까
왜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을까 이러한 것들을 탐구하려는 심리는 무엇일까
영원성에 대한 갈구일까? 영원하다는 것은 더 가치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모든 의미는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서만 존재한다면 어떤 행위도 의미없는 것이 될까?
세계에 나 혼자라면 어떠한 주제로 책을 쓰는 것이 의미있을까?
평생 지금 이 방 안에 갖혀 살아야 한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럼 이 방 안에 갖히지 않았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둘의 답이 같을 수 있을까?
둘의 답이 다르다면 둘의 차이는 뭘까?
의미라는 것은 인위적인 창작물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부여하는 부조리한 행위가 아닐까
한계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의미부여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
단순히 그런 것이라면 나는 굳이 그것을 할 이유는 없다…
왜 나는 세계에 존재하는 걸까
내 몸에는 새로운 것과 옛 것이 계속적으로 교환되는데 어떻게 연속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이러한 고민이 사라질까… 사랑은 무의미한 일상을 잊게 해주는 꿈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잊고 살고 있는 것뿐이지 않을까.
잊어버린다는 것은 도피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의 답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으며 답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까뮈가 떠올려보라고 한 행복한 시지프는 도저히 그려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두가지 진리라고 할만한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미각은 자체로 즐겁다는 것, 먹는 것은 고민할 이유를 잊게 해준다. 원초적인 것은 하나의 진리이다.
또 하나 예술이 주는 아름다움, 생명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에서 나는 진리에 가까운 것을 발견한다.
생명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세계의 질서를 느낄 때마다 나는 한계가 없는 어떤 것을 떠올린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심장은 내가 살아있노라고 더 빠르게 뛴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은 참으로 부인하기 힘든 신비이다. 바하의 음악은 인간의 창조물이지만
나는 그것에서 인간 이상을 본다. 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에서 생명 이상을 본다.
그것은 신에 대한 감각이다.
나는 숨막히는 허무감 속에서 신의 흐릿한 그림자를 더듬는다.
성경을 쓴 바울은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우리가 (청동)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이후에는 밝히 보게될 날이 올 것입니다’
희미함 속에 나는 갑갑함을 느낀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로 한계지워져있다.
공간과 사회적 한계, 그리고 사고의 한계, 모든 것은 한계 속에 놓여있다.
나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의 지배를 받고 있고, 해석되지 않는 신비로움 속에 살고 있다.
한계는 부자유를 의미하며, 부자유는 권태를 낳는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논하고 있다.
미적인 것만이 의미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호흡하고 있다.
내 육체는 보이지 않는 산소를 호흡하고 내 영혼은 아름다움에 내재되어 있는 신의 느낌을 호흡하고 있다.
나는 20년 뒤에 겪을 인생의 바닥의 기분을 의도적으로 미리 당겨와서 경험하고 있다.
지독한 부자유가 내가 나의 신앙적 면모를 다 할퀴어가고 있다.
하지만 신앙은 보이지 않는 곳에 뿌리처럼 남아서 호흡을 지탱하고 있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을 사랑한다.
이것을 ‘비약’ 이거나 ‘도피’라고 불러도 좋다. 나도 그들을 ‘편견’이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
아직 모든 것은 지독한 권태 속에 있다.
생에 대한 혹은 영원에 대한 집착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권태만큼은 진정 ‘의미’있는 경험이라고 여기겠다.
소통
답답해
아무도 소통할 사람이 없어
하지만 왜 그 상황이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걸까
누군가 내 상황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걸까
아니,
내가 왜 그런 걸 바라는 거지?
그게 상황을 달라지게 하는 걸까
모두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고 싶어
삶이 덧없어
모든게 무의미해 죽음만이 나에게는 의미야
난 죽음을 동경해
하지만 난 자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건 다른 거야
어쨌거나 삶이란
덧없음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어
견뎌야 하는 과정일거야
왜 가을에 메말라 떨어질 것을 알면서
나무들은 그 무성한 잎사귀를
한여름 내 피워냈던 것일까
오늘 밤은 저 낙엽지는 나무와 대화해보아야 겠다
그는
자신의 잎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