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3,4장

드디어 솔로몬은 왕권을 단단히 하고 모든 반역의 가능성을 처리함으로서
견고한 나라가 세워졌다.
3장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그에 따라 백성들을 재판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 다윗성(1절)
솔로몬은 바로의 딸을 취하여 다윗성에 두었다고 나온다.
다윗성은 다윗이 여부스 족속에게 빼앗은 성으로서 시온 산성,
나중에 이 성이 이름이 바뀌어 예루살렘이 된다.(대상 5:7-9)
다윗이 그 성에 거하였고, 후에 법궤를 되찾아 다윗 성으로 들여놓는다.
이 곳은 다윗시대 통일 왕국의 수도였다.
후에 솔로몬은 다윗성을 북쪽으로 확장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산을 포함시켰다.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결혼을 한 것은 솔로몬 왕국의 위치를 애굽과 같은 열강들 사이에 두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수많은 이방 여인은 이방신을 섬기도록 함으로서 나중에 솔로몬의 앞날을 어둡게 하였다.

2. 기브온 산당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던 장소는 바로 기브온 산당이다. 산당은 대개 이방종교의 신을 숭배하던 장소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가나안 사람들이 기존에 숭배하던 산당이 곳곳에 있었다. 그들은 지구가 평평하며 신들은 높은 곳에 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높은 곳에 자리잡은 숭배의 중심지가 신들의 관심을 더 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산당을 파괴하라고 지시하셨다(민 33:52)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존속하였으며, 나중에 이스라엘 왕들의 발목을 잡는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서 계속 남는다.
2절에는 여호와의 전이 건축되지 않아서 계속 산당에서 제사드렸다고 나오나, 3절에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드렸다’ 라는 구절은 이러한 사실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기브온의 산당은 다윗 시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산당으로 보인다. 규모도 컸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던 처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기브온 산당이 가나안 정복 전부터 있던 곳인지, 혹은 예배처소로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기브온은 예루살렘 북서쪽 8km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가나안 족속들의 4대 성읍 중에 한 곳이었다. 이 곳의 산당에는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있었으므로 성전이 만들어지기 전 예배처소임에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산당을 다 없애라고 하신 의미는 분명하다. 그들이 가나안의 이방신들을 섬기도록 산당이 끊임없이 그들을 유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

3. 일천번제
일천번제를 천일동안 번제를 계속 드린 것인지, 천마리의 제사희생을 드린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역대하1장의 내용에는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다고 하는 것을 보면 후자의 의미인 듯하다. 그러나 천일동안 한마리씩일수도 있고 한번에 천마리를 드린 것일수도 있다. 그리고 일천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많은’을 의미하는 것 일수도 있다.

4. 솔로몬이 구한 지혜
11절에 보면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이라고 나온다. 이것은 솔로몬이 구한 지혜가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세상의 엄청난 지식과 판단력으로 주신 것임은 분명하다.
지혜를 구한다고 해서 다 솔로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솔로몬 같은 지혜를 달라고 하지만 의도는 다르다. 내가 공부 잘하기 위해서, 무언가 내 인생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 지혜를 구할 때가 많다. 그러나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네가 너 자신을 위해 구하지 않고 내 백성을 위해 지혜를 구하는 것이 기쁘셨기에 그의 대답을 듣고 모든 것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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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은 지금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했다.
그러나 산당에서 드렸던 예배, 이방인과의 결혼은 그의 생의 오점이다.
다윗과 솔로몬의 경우에서 하나님께 정말 온전한 마음으로 살고자 했던 자들이지만, 그들의 말년은 조금은 불행했음을 느낀다. 밧세바와의 동침,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
성적인 유혹만큼 쉽게 사람을 무너뜨리는 죄가 있을까.
다시한번 이 것들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나의 삶도 더 나아질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2003.4.3

열왕기상 4장

솔로몬 왕국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4장은 다윗의 시대와 솔로몬의 시대가
극명하게 다름을 보여준다
다윗의 시대는 전쟁과 정복의 시대였다.
사울의 세력으로부터 시작하여, 블레셋, 암몬, 여부스, 압살롬, 아도니야까지 이어지는 그의 역사는 전쟁과 정복의 역사였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에 언제나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의 시대는 평화의 시대였다.
그가 다스리는 40년간 전쟁이 전혀 없었고, 인구는 늘고, 모두 안연히 거하였다고 나온다. (24-25절)
본래 이스라엘은 지파간의 경계로 12구역으로 나뉘었으나 솔로몬은 이를 무시하고 새롭게 전체를 열두 구역으로 나눈다. 이로서 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다.
솔로몬 12행정구역을 설명한 지도책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3대 왕위에 오른 솔로몬에게 주어진 과제는 부왕인 다윗이 이루어 놓은 대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다윗 당시에 일어난 반란과 백성들의 불만을 잘알고 있었으며 대형 건축사업을 위한 막대한 재정을 위해서도 강력한 제도적인 조치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관직부서의 조직은 다윗 당시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거기에 궁내대신과 관리장을 추가하였으며, 지방 행정도 확대 강화하였다.   
특히 전국을 12구획으로 나누어 그곳에 각각 책임자인 관장을 두어 관리케하였다. 이같은 행정구역 정책의 가장 큰 이유는 각 지방의 충성심을 조정함으로 예루사렘이 있는 중앙정부에 완전히 묶어 두려는 고도의 목적과 건축사업을 위한 막대한 재정의 원활한 각출을 그 목적으로하고 잇었다. 그래서 이들 관장 중 벤아비나답과 아히마아스는 왕실과 혼인관계로서 직결되어 있었으며 관장들은 왕과 왕실의 음식 1개월분을 일년에 한번씩 돌아가며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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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대통령이 되고 인사정책을 편 것이 큰 파격이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솔로몬과 비교해볼만한 대목이다.
솔로몬의 인사를 보면 다윗시대의 인물들을 그대로 쓴 경우(여호사밧, 아도니람)도 있고, 요압을 대신해서 브나야를 기용했고, 서기관을 둘로 늘렸다. 또 사독의 아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계속 잇도록 했다.

열왕기상 1,2장

사무엘상에 이어 열왕기상은 다윗의 말년으로부터 시작하여 솔로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다윗은 늙고 기운이 없는데 그 틈을 타서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자기 스스로 왕이 되려고 높인다.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5절)
스스로 낮춘 요나단의 모습과 스스로 높이는 아도니야는 극한 대조를 이룬다. 아도니야는 훌륭했다. 그는 왕이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넷째 아들이었지만 압살롬이 죽고 그는 살아있는 다윗의 아들중에서는 최고 형이었다. 그 당시 풍속으로는 그가 왕이 되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는 용모 준수하고 행동도 평소 바르게 해서 다윗왕의 신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신다. 왕을 결정할 권한은 하나님에게 있었다.

다윗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하는지 관심도 없었고,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일도 미루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나이가 많아 신경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순종키 위해 솔로몬을 왕으로 세워야만 했다. 그 때 그 사실을 기억하게 했던 인물이 바로 나단이다. 나단같은 선지자가 있었기에 다윗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지혜로왔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왕에게 바로 전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다. 다윗의 범죄로 낳은 아들 솔로몬. 그가 왕이 되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도니야의 반란은 압살롬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 깨달았다. 그는 제단뿔을 붙잡고 용서를 구했다.그리고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자기 종들의 목숨도 구해달라고 햇다. 솔로몬도 그를 용서했다. 자신의 형이었다.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될진대 내가 머리카락 하나도 건들지 않겠다. 그러나 악한 일을 하면 바로 죽일 것이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비극으로 삶을 마친다. 바로 아비삭을 구한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도니야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서라기보다는 일시적으로 목숨을 부재하기 위해서 제단뿔을 잡은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지극히 싫어하신다. 스스로 높여서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왕은 세워졌다.

왕상 1장의 제단 뿔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현대어 성경을 보면

아도니야도 솔로몬이 두려워서 홀로 일어나 성막으로 가서 제단의 네모퉁이에 돋은 뿔을 붙잡았다. 아무리 살인자나 천하의 죄인이라 해도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제단 뿔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목숨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아도니야에게 `성막에서 나가시오’라고 하자, 그는 `솔로몬이 두려워서 제단 뿔을 놓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가 제단 뿔을 잡고 관대한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왕에게 전해졌다. `아도니야는 왕이 나를 죽이지만 않겠다고 약속해 주면 이 제단에서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라고 나와있다. 제단 뿔 네 귀퉁이는 어떠한 죄인이던지 보호받는 피난처이다.
출애굽기 20장에는 제단에 대한 규정이 나온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제단은 돌로 쌓을 수 있었지만 다듬은 돌로는 쌓을 수 없었다. 또한 계단을 만들 수 없었다. 이는 다른 우상의 제단과는 전혀 다른 차이였다. 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으며 그 제물을 통해 속죄가 선포되었다.




열왕기상 2장

2003.4.1

아도니야의 왕권 찬탈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다
다윗은 40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죽으니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다윗의 유언은 역대상과 비교해볼 때 사무엘상에서의 관점은 좀 다르다
역대상은 그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것에 대해서 솔로몬에게 집중적으로
이야기 하는 면을 다룬다.
그러나 열왕기상 2장에 나오는 그의 유언은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징벌과
돌봄을 부탁하는 것을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다윗의 유언은 세가지이다.
1. 요압에 대한 징벌
2.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 대한 선처
3. 시므이에 대한 보복

다윗은 생전에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면서, 스스로 원수 갚는 것을 도전으로 여겼다. 따라서 일견으로 그러한 다윗의 면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유언은 그의 신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2장에서는 필요하다.

첫번째로 요압에 대한 다윗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았다.
다윗은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에게 행한 일에 대하여 그를 편히 죽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고 솔로몬에게 이야기 한다.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그에게는 조카뻘 되는 관계이다. 먼저 그가 죽인 아브넬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 총사령관으로서, 골리앗을 죽이겠다고 한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온 인물이기도 하면서, 사울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사울이 죽고나자 그는 사울의 살아남은 넷째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위에 앉히고 다윗의 군대와 기브온 전투를 벌인다. 여기서 그는 요압의 형제인 아사헬의 추격을 받게 되고, 그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자, 창으로 찔러 죽인다. 이것은 정당방위였다고 이해해야 한다.

아브넬은 비록 사울의 군대장관으로 있었으나, 충직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옮겨갈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에 동의했다. 그는 다윗의 신하인 요압과의 화평을 위해서,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을 결코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사울에 이어 왕이 된 이스보셋이 자신을 사울의 첩을 통간했다는 혐의를 덮어씌우자 결국 이스보셋을 버리고 다윗에게 신복을 보내 그의 편에 가담하려고 했다. 후에 다윗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는데 그 때 요압은 속임수를 써서 아브넬을 죽인다.

요압의 아브넬 살해.
요압은 다윗에게 아브넬이 스파이 노릇으로 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에는 요압이 동생 아사헬을 죽인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분명 이것에는 요압의 정치적인 야욕이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아브넬이 다윗의 편에 가담한다면, 그는 다윗의 신임을 받아 자신의 군대장관 자리를 위협할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요압은 그런 아브넬에게서 분명 경쟁의식과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브넬 살해는 전쟁 중의 불가피 한 것이 아닌 분명 보복, 살인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놓고 심히 가슴아파했다. 내 생각에는 다윗이 아브넬을 만나고 그의 신앙적인 모습과 인간적인 면모에 깊이 빠져들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별로 없는 듯하다.

다윗은 이 일로 당시 요압을 심각하게 저주했는데, 바로 벌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요압과 아비새 형제를 징벌할만한 힘이 없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군대장관으로서 그의 자리가 중요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는 여부스를 징벌하고 암몬 아람 연합군을 처부수는 등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또한 밧세바 남편 우리아 살해를 공조하기도 하였고, 에돔 정복에도 가담했다. 요압의 공로는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면은 날카로워보인다.
그는 반역자 압살롬을 처형했다. 다윗은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하라고 그의 신복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정쟁중 한 사람이 요압에게 압살롬이 나무에 달려있다고 보고하자, 왜 그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책망하고 직접 자신이 가서 창으로 심장을 찔러 죽였다.
다윗은 그의 죽음을 듣고 매우 슬퍼했다. 그리고 이 참에 요압의 자리를 뺏고 아마사를 대신 군대장관으로 지명하려 했다. 여기서 요압은 다시 아마사를 죽이는데, 아브넬과 같은 이유였다. 다윗이 그를 군대장관으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요압에 대한 처신은 무리가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요압은 수많은 피를 손에 흘린 살인자였다.

2. 바실래의 아들들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망명했을 때 다윗과 군대에 식량을 지원했던 사람이다.

3. 시므이
그는 압살롬의 난 때 다윗과 신복들이 바후림을 지날 때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신랄하게 저주한 인물이다. 그는 사울왕에 대한 충정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반란이 진압되고 시므이는 다윗이 환궁할 때 그에게 용서를 빈다.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가 그를 죽이라고 했으나 다윗은 용서한다.
다윗은 아마도 시므이가 솔로몬의 왕위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므이는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므로 그 죄를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나 다윗은 그를 용서한 바 있다. 다윗은 그를 지혜롭게 처리하라고 명했고 솔로몬은 다윗의 말을 지켜 그를 처리했다.
역시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처리도 어떤 한도를 뛰어넘지는 않는 것 같고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되자 아도니야는 아비삭을 아내로 맞아들일 계교를 꾸민다. 그러나 그것은 솔로몬에게 간파되고 그는 죽임을 당한다. 아비삭이 아름다워서 였을지도 모르나, 그는 여전히 아비삭으로 인해 자신의 왕좌 계승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관습으로 선왕의 후궁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왕좌를 계승할 수 잇는 권리가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한 명령에서도 나타난다.(삼하 16:21)

또 솔로몬은 아비아달의 제사장 직분을 박탈한다. 그는 엘리 가문의 5대손으로 엘리-비느하스-아히둡-아히멕렉-아비아달의 계보이다. 엘리는 망나니 같은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하는 짓을 막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문의 저주를 받는다. 그의 후손은 제사장 직을 영원히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울이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모두 살육하면서 성취되었으나, 대량학살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아비아달이었다. 그는 아도니야의 반란에 동참해서 결국 쫒겨났으니 그 저주가 완전히 이루어진 셈이다.

솔로몬은 브나야를 새로 군대장관으로 삼고 요압을 처형하라고 명한다. 요압은 아도니야처럼 제단뿔을 잡았지만, 바로 최후를 맞이한다.
32절을 보면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대장관 아브넬 유다 군대 장관 아마사’ 라고 한다. 분명 아브넬은 의롭고 선한 부류의 믿음있는 신하였다고 생각된다. 그가 죽인 것은 분명 둘 다 군대장관들이었으니 그의 야욕이 바로 드러나는 구절이다.

또한 시므이도 죽임을 당하였으니
다윗의 솔로몬에 대한 부탁과 이루어진 모든 결과가 2장 한 장에 다 이루어진 셈이다. 모든 반란까지 제거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평화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은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렸으나 솔로몬의 시대에는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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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의 내용은 어려웠다.
사무엘하를 다시 대부분 읽어보아야 했다. 특히 아브넬의 살해장면과 압살롭 반역하고 아마사가 살해되는 장면을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 공부에서 주된 성과는 아브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또한 사무엘-열왕기와 역대상하 의 차별성에 대한 인식이다.
다윗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았고 부당하게 보복하지 않았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사랑받는 자로서 왕위가 잘 계승되었다. 지금까지 내용은 너무나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최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마태복음 5장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갈릴리에 이르셨을 때 수많은 무리를 산에 앉혀놓고 하신 말씀이다.

오늘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1.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뒤에는 무슨 말이 나올까?

답은 이것이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하나님 스스로를 나타내신 것이다.

어떤 신학자가 이런 식의 비유를 했다.
내 기억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로 기억한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개의 아들은 개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사람이 낳은 아들은 사람으로서의 character 를 지닌다.
따라서 하나님의 독생(only one)자이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character 를 지니신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그가 세상에
나타나심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God with us) 이신 것이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듯 추상적인 의미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입고 행하셨다.
사람들과 함께 거하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분이었다.
그분을 본 사람은 없었다. 모세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나
얼굴이 아닌 등만 보았다. 다른 이들은 그분의 영광을 두려워서 접근하지도
못했다. 정결하지 못한 인간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광(얼굴)을 본다는 것은 곧
자기 죄로 인한 죽음을 의미했다.
디모데전서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고 또 볼 수 없는 자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달라졌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특이하게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에 눈에 보이게 함께 생활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그를 본 자는 다 하나님을 본 자들 이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을까?



2.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자들인가?

그럼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본 것인가?
육적으로는 그들이 다 눈으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을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먼지가 자욱히 끼어있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안개가 자욱한 길에서 50m 정도 떨어진 사람을 보거나
또는 먼지가 낀 안경, 거울로 다른 사람을 본다고 생각해보면
절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든 것처럼, 마음의 청결함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으나,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다.
일종의 편견이다.

그렇다면 그들앞에 끼어있던 먼지는 무엇인가?
바로 그들의 메시아와 관련된 편견이다.
유대민족은 다른 외부의 침략과 고통으로 당시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민족적 괴로움을 겪고 있었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기름부은자, 왕으로 오실 다윗의 자손을 바라고 있었는데, 바로 그 기름부은자(메시아)가 유대민족을 로마나 다른 외세로부터 구원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강력한 왕권으로서 유다를 통치할것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마치 성경(구약)은 그런 메시야를 보내줄 것을 약속한 것처럼 보였다.

세례자 요한이 인정한 예수님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그가 행하는 이적은 그를 메시야로 증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안식일을 범하고 있었다. 요한과 달리 포도주도 마셨으며, 죄인들, 세리들을 가까이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로마 권력에 대해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반된 사실은 혼란을 가져왔다.
예수는 누구인가? 과연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아인가?
예수님에게 특별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왜 빨리 로마로 부터 저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강력한 나라를 세우지 않는지 의아해했으나 언젠가는 그렇게 할 것으로 믿었다. (서로 큰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운 것도 그들이었다.)
베드로는 그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으나, 그도 잘못된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왜 예수님이 나는 죽어야한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과 무리는 기대감에 부풀어올랐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
군중은 극도로 흥분했다.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들은 기대하던 메시아가 도래한다고 생각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는 것은 로마에 대해 반군을 일으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징조가 아닌가?

그러나 그분은 말이 아닌 나귀를 탔다. 말은 전쟁의 상징이나, 나귀는 반대로 평화의 상징이다. 그분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군중들은 또다시 실망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기미가 안보인다. 왠지 속은 느낌이 든다. 저 사람이 과연 그럴 의도가 있는 걸까.. 도저히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안든다.
군중은 화를낸다. 뭐하러 왔냐.. 십자가에 못박아라
순식간에 태도는 돌변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들이 원하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메시아인지 반신반의하던 어떤 이들은 그래 십자가에 달아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설마 진짜 메시아라면 거기서 죽진 않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들은 예수를 보았으나, 그가 하나님이며, 그가 하는 일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민족을 구원하고 유대인, 이방인의 벽을 허문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러 오시기 위한 분임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교만과 선민의식으로 인해,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여겼으므로, 예수님의 구원의 보편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들은 분노하며
‘왜? 니가 메시아면 한번 자신부터 십자가에서 구원하고 뛰쳐내려와봐라..’
라고 욕을 했던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수많은 천사를 보내어 사태를 뒤집으실 수 있었지만
이사야서 말씀과 같이 털깎는 자 앞에서 어린 양처럼 잠잠하셨다.
그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백성들의 죄를 짊어져야할
사명을 가지고 이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욱한 안개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거기 마음이 청결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옆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행악자였다.
두 행악자중 한명이 ‘니가 메시아라면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좀 구원해봐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행악자가 말한다.
‘임마 너나 나나 우리가 잘못해서 십자가에 달렸지만,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나?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좀 생각해주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실로 엄청나고 놀라운 고백임에 틀림없다.
그 행악자는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눈치를 챘다.
그는 죄가 없었으나 십자가에 달려있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온갖 병과 귀신에서 구원했지만 자신은 구원하지 않고있다.
그의 능력과 말씀은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것은 그는 날 좀 십자가에서 내려주십시오 라고 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알았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 나라는 존재할 것을 알았으며, 예수는
그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실로 찾기 힘든 믿음이며
어떤 유대인도 그런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비교해봐야한다. 예수님의 이적과 권능을 누구보다 많이 보았던
그분의 측근들을 포함한 12제자와 모든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기대가 무너지자 다 뿔뿔히 도망갔다.
그렇게 위대했던 사도들도 저 흉악범의 믿음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조차도 의심했으며,
부활 후의 그리스도의 설명, 성령의 증거를 통해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말씀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을 본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 결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죄인,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모두 메시아가 그들을 자신들의 고통에서 구해주기를 바랐고
그런 고통을 구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화를 냈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했던 사람,
메시아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이해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이 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역들을 하고 계심을
인정할 줄 알았다.
영화 오만과 편견을 봤는데 이 영화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때
얼마나 쉽게 편견에 빠지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하물며 인간이 다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볼 때 얼마나 더
많은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대하기 쉽겠는가?
그 때 자신은 하나님의 방식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아가야한다.

살다보면 때로 저 성경 속의 유대인들과 십자가의 흉악범들처럼 고통과 고난 속에 하나님을 찾을 때가 있다.
새로운 나라를 일으켜달라고, 십자가에서 내려가게 해 달라고 우리는 하나님
께 구하곤 한다.
그러나 때론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에게 등을 돌리신 것처럼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지속되며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기도도 응답되지 않으며, 모든 원하는 일들은 거꾸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닌가?
하나님은 기도를 듣는 분이 아닌가?
성경에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그 길이 평탄해야한다고 하지 않는가?
왜 십일조를 해도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시는가?
왜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가? 하나님은 진정 무관심한가?
이런 의문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신앙으로 접어드는 경우도 생긴다.
욥도 그랬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던 욥이나, 그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임을 놓지도 않았다. 그는 시험을 통과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심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먼지, 안개와 같은 것이다.
그것들을 제거한 자는 투명하고 청결한 마음을 가진다.

그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비록 고통과 고난 중에 거할지라도
다윗처럼, 욥처럼,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본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전쟁과 고난과 굶주림, 고통, 미움, 악의, 손해가 찾아오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분의 일을 인정하는 자세야 말로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의 자세이다.

보물

병 속에 맛있는 것들을 놓지 못해서
잡히고 마는 어리석고 또 가련한 원숭이들.

내 손에 놓을 수 없어 꽉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저히 놓지 못해서 꽉 쥐고 있는 것.

이 것을 놓으면
나, 진정 자유를 맛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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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우신 주님
주님을 생각합니다

주 안에 있는 보물을
포기할 수 없나이다

주님을 생각할 때 느끼는 기쁨
그것이 당신 안의 보물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