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과 정치

얼마전 CBS에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이 모여서 한국교회에 대해서 비판과 토론을
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번 아프간 사태와 기독교 내부적인 문제들을 놓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취지가 반갑더군요.
그 중에서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정치운동에 대해서 한 패널이 비판을 가했는데,
교계 목사들이 미국의 전쟁에 찬성하는 운동을 펼치거나, 혹은
강경보수단체들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등의 정치집회에 대해서 비난하자
패널로 나오신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부 기독교지도자들의 정치행태는 비판받을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대로 종교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더욱 위험한 생각이다. 종교가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는 없다.’

들으면서 참으로 명쾌한 답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기독교인도 한 나라의 정치적
책임을 담당하는 주권자인 만큼 정치에 대한 입장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정치에 대한 관심은 매우 편협되어 있습니다.
국회의원 중 기독교인이 몇%인지, 혹은 대통령으로 나온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교회에서 그런 외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더라 아니더라…

하지만 이것만큼 위험한 발상이 있을까요?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이 대통령으로 나왔을 때 찍으면 안됩니까?
저는 하루빨리 교계가 이러한 편협적인 정치에 대한 시각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교회를 다니거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결코 판단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정치계는 종교를 이용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오신날에는 절에 가고, 성탄절에는 교회에 가는 정치인들.
그들은 왜 그러한 행위를 할까요?
연설이나 간증 등의 행위를 통해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다 신앙이 훌륭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세우는 것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또한 아닐 수 있습니다.
단순한 겉모습으로 사람을 결코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임을 내세웠던 사람들이 부도덕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위를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이 볼 수 있었던가요?

미국의 정치행태는 기독교적인가요? 세계적으로 보수기독교의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내세우는 부시의 대내외 정치행위는 기독교적인가요?
저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교회가 심각한 우려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공평과 정의로움이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들에게 신앙이 없어서
문제라고 하셨나요? 물론 신앙의 부재도 그들의 문제였지만,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지도자들의 신앙을 언급하신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불공평, 백성에 대한 착취, 부도덕, 사리사욕 등에 대해
더 많은 언급을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서 칭찬을 받았나요? 그는
백성의 송사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맡은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며, 정치인에게 구할 것은 공평과 정의입니다.
사리사욕을 좇지 않는 마음, 그리고 지혜로운 결정력을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독교인 정치인을 뽑는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있으며, 불교인 정치인을 뽑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교회가 속히 깨닫게 되었으면 합니다.

어떤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고 입법부의 사람들이 모두 기독교인이 되어 헌법까지 기독교로 바꾸어버리면 그게 정말 최상의 정치행위가 될까요? 가끔 보면 이러한 이상을 꿈꾸는 기독교인이 간혹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매우 위험한 판단입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강제하지도 않으셨고, 강요하신 적도 없습니다.
국가는 종교에 대한 자유를 부여해야하고, 종교에 대한 선택은 본인의 자유의지대로 해야하는 것이지, 강제해야한다고 신앙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슬람의 무슬림정권들이 열리기를 기도하는 것은 옳지만, 한 나라가 기독교국가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국가라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의 대상을 택할 때 이루어집니다. 정치인들이 기독교를 믿는지 안믿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공평과 정의로 국가를 다스리고 외교력을 발휘할 것인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비기독교인 정치인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정치하는 사람은 저는 두렵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정치를 할지
혹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정치를 할지 누가 알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기도할 것이며,
바른 사상과 정치력을 가진 지도자가 되기를 구해야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선택

열왕기상 10장에는 솔로몬의 이야기가 나온다.. 솔로몬이 지헤를 구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 이후에 지혜를 구한 솔로몬은 여러 나라에 그 명예를 떨치게 된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솔로몬은 부함을 구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부귀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는 당대 최고의 부자와 지혜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왔으니…

이 글귀는 열왕기상 10장 말미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 글귀를 단순하게 읽으면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상당하였고, 솔로몬의 업적이 대단하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매우 큰 착각이다.
이것은 솔로몬의 매우 심각한 첫번째 인생의 대 실수의 기록이다. 더 보기 “솔로몬의 선택”

메워주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매워주신다
라는 식의 신앙은 곤란하다

하나님은 실제로 매워주시지도 않을 뿐더러

만약 매워주신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 진실로 드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을 때 그 자체로
만족이 되어야 한다

십일조를 드렸다고 더 부자가 될 것이라고 믿는것인가
공부해야할 시간에 성경을 읽었다고 더 성적이 좋게 나오기를 바라는가
일해야 할 시간에 예배를 드렸다고 사업이 더 잘되기 바라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거래 대상으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림 자체가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로인해 더 가난하고 결과가 나쁘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질지라도
내가 하나님께 드림 자체의 의미를 새겨야 한다
그것은 갚음을 받기 위한 드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전도서 3:11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
정말 현실적이면서
아주 감각적이면서
통렬하면서
핵심적이면서
매우 중요하면서
오묘하면서
깊은 구절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2)

오늘은 이 구절에 대한 이해를 기록해둔다.

공관복음서를 읽고 있는데 특별히 혈루증 앓던 여인과 바디매오 이야기가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혈루증이라는 부정한 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수많은 의원들을 찾아갔지만,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동안 많은 재산을 날리고 상처를 경험했다. 공동체의 소외도 경험했다.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사람들과 접촉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여자는 예수께서 그 가운데로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옷만 붙들어도 병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그녀는 혈루증으로 인해 부정했다.) 그녀는 주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몰래 그리스도 뒤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그분의 옷을 만지기로 한다. 마침매 예수가 그녀곁은 지날 때, 그녀는 몰래 그분 옷을 만졌다.

그녀는 천국을 침노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았다. 예수님의 능력은 그녀의 피를 마르게 했다. 병이 치유되었다. 부정한 그녀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일원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이방인처럼 버림받은 유대인, 영원히 부정한 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천국을 빼앗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놀랍게도 그것을 눈치챈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예수,
사람의 심중을 뚫어보시는 분이 갑자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호통을 치신다.
그녀는 ‘이제 죽겠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계획이 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할까. 그녀는 자신이 손을 대었다고 밝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두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분을 피할 수는 없다. 그녀는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예수께 자기가 한 일을 말씀드렸다. 그 이야기를 듣던 예수는 전혀 생각이 못한 방식으로 그녀를 부르셨다.

‘딸아…’

이 말에 얼마나 가슴 뭉클하였을까.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따뜻하게 불러주는 말을 들은 것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12년간 혈루증으로 외로움과 고통과 소외를 겪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제 그녀의 마음의 병도 치유함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육신의 질병뿐아니라 외로움과 소외로 지친 그녀의 마음도 고치셨다. 그녀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그녀는 천국문 밖에 버려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천국을 침노했고… 빼앗았다..

바디매오… 여기로 지방에 살던 소경거지였던 바디매오는 동료와 함께 구걸로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수많은 군중들이 웅성거리며 자기 옆을 지나가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는 이것이 무슨일인가하고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하고 퉁명스레 알려주었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그 분이 있단 말인가? 바디매오의 심장은 뛰기 시작한다. 흥분을 멈출 수가 없다. 평생한번 있을까 말까한 찬스.
하필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신다는 말인가..
그동안 소경 거지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던가. 춥고 배고픈 것은 둘째치고, 자신을 죄인취급하던 사람들의 경멸과 소외감. 그에게는 얼마나 컸던가. 그는 어디계신지도 모르는 예수를 큰 소리로 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의 욕이 쏟아졌다. ‘조용해라! 시끄럽다!’ 어디 왕이 입성하시는데 감히 방해하는가… 이분은 어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길이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에는 어떤 신분인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소경이 된 것은 누군가의 죄 탓이겠지 ‘ 내 죄’이거나 ‘부모의 죄’이거나… 천국 바깥에서 슬피울며 이를 갈 사람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던가… 나는 죄인…
‘천국’.. 그것은 자신과 상관이 없어보이는 단어였다. .. 그러나 그는 그것을 침노하기로 한다!

군중들의 욕? 그것은 이미 안중에 없다.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이므로.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자신이 평생 질러보지 않은 가장 큰소리로 예수를 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께서 멈춰서셨다. ‘다윗의 자손’이라니 누가 나를 부르는가
평소라면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발언을 하지 말라고 하셨을텐데, 오늘은 웬지 그런 말씀이 없으시다..
‘그 사람을 불러라’
사람들이 소경에게 그 말을 전해주자 바디매오는 겉옷을 버리고 그분 앞으로 뛰어갔다.
예수는 질문하신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은 거지였던 바디매오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다.
‘돈을 줄까? 아니면 옷? 아니면 무엇을 줄까?’ 다시말하면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보느냐? 내가 너에게 어떤 것을 줄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느냐?’
그의 믿음의 크기를 보고자 하신 것이다.
그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해서 부른 것이라면 평소에도 얼마든지 구걸할 수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보는 것’이다. 나도 ‘이 죄인의 딱지’를 떼고 싶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는 가슴이 여미는 아픔을 느끼셨다. 그런 불쌍한 마음으로 그의 눈에 손을 대사 고치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는 천국을 침노했다… 천국문 밖에 서있던 존재.. 그는 소리질러 천국을 침노했고 그것을 빼앗았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은 귀신들려 있었다. 그녀는 헬라인… 가장 하나님의 나라에서 먼 자… 주로 지방은 철저하게 헬라화된 이방지역이었다. 예수께서는 두로 지방에 들어가셨다. 몰래 들어가셨지만 그 소문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미쳤다. 그녀는 예수를 찾아갔다.
‘주님 내 딸이 귀신들렸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반응이 없었다. 그분은 이스라엘민족에게 관심이 있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 이방인보다는 이스라엘이 우선이었다.
성령이 오시는 그 때… 복음은 이방까지 선포될 것이며, 그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그분은 사역을 – 십자가 사역을 – 준비중이었다.
그의 발로 사단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의 예수의 사역은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에게 촛점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여인도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자격이 있다는 전제까지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다. 순서가 달랐을 뿐이다. 결국은 둘(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방인이 참으로 싫었다. 왜 숨어계신 곳까지 와서 설치는가 – ‘주님! 쫓아내십시오!’
예수님도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다. 그것은 두가지이다.
‘넌 자격이 없다는 걸 아니?’
또하나는 ‘너 혹시 나를 이방 마술사처럼 생각하는것 아니니?(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니)’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의 어린양 외에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여인은 고집스러웠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의 표현을 들으셔야 했다. 단순히 도와달라, 고쳐달라는 말은 무의미했다.
‘자녀의 떡을 개들한테 던지는 것은 마땅치 않다’
자존심을 건드렸다. ‘넌 천국의 자격이 없잖아.. 그리고 난 마술사가 아냐’
그녀의 대답은 놀랍도록 겸손하고 현명하였으며, 천국을 침노하는 믿음이 있었다.
‘주여 그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녀는 주인의 음식, 아들의 음식을 빼앗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자격없음을 알았다. 또한 부스러기 만큼의 작은 예수의 능력이라도 충분히 자신의 딸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믿었다. 진실로 예수께서 칭찬했던 백부장과 같은 믿음이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작은 능력으로 하실수 있다는 믿음은 큰 믿음이다. 그녀는 예수를 크게 보았기에 부스러기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녀는 결국 천국을 침노하고 빼앗았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