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죽으심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말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속으로 묵상하면서

아! 그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
다. 오히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보여진 독생자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사
랑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앞에 드렸을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네가 네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줄 알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항상 이야기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뜨거운 사랑은 잊어가고 있지 않은가 돌아봅니다.
아들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솔로몬의 영광과 한송이 백합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28-29)

하나님께 모두 내어 맡긴 들의 핀 한 송이의 백합화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던 솔로몬 조차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 못하였으니.

하나님께 모두 내어 맡긴 들의 핀 한송이의 백합화가 말이다.

세번째 퀴즈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을까요?

어려운 퀴즈가 될 것 같은데요..
저도 답을 못냈습니다. 아직요.. 방금 생긴 질문입니다.

참고구절 마 5:22, 3:7

99.3.30

세번째 퀴즈의 답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저는 상상도 못했는데..
뜻밖의 지혜를 주셔서 답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다른 사람을 욕하면 살인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분께서 바리새인등을 부르실 때는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설명으로 무엇이든지 설명가능하지만
그 예외가 과연 성경에 나와 있는 예외 인지가 저에게는 중요했기에..
… 결국은 그것을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비느하스의 질투심입니다.
살인은 죄이지만…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었고 그는 영원한 평화의 언약인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하나님께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얼마나 놀라웠던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질투심.. 이라면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질투심이냐하는 것은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일
인것 같습니다. 비느하스의 경우에 대해서는 직접 살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또 시내산에서 우상숭배로 더러워졌을 때 레위인들이 그들을 쳐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일도 있습니다.

저같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민수기 25장에 비느하스의 이야기가 있고
출애굽기 32장에 형제들을 도륙한 레위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내린 답변입니다만 역시 부족한 사람인지라
별로 동감하지 않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성례주일과 세례

지난 주는 성례주일이었다.
우리 교회에서 스무명 남짓한 분들이 세례를 받았다.
나는 고 1 때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나 회심한 사람이다.
회심 이후로 바로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까 1995년 10월이었다.
오늘 세례받는 내가 네례받던 또래의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참 새로웠고
목사님의 성경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세례문답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도 마음속으로 다시한번 되뇌였는데
고등학교 때 내가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기도에 힘쓰겠다는 고백이 가슴을 찔렀다.
…. 기도에 힘쓰겠습니까?
예..

나는 기도를 잘 안한다. 그래서 올해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려 한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솔로몬의 기도와 같은 그런 기도를 하고 싶고
열심히 하고 싶다.

오늘은 성령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세례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었기에
나누고 싶다.

나에게는 막10:38말씀이나 눅 12:50 의 말씀이 참 난해했었는데 뜻밖에
해결을 볼 수 있어서 참 기뻤다.

너희가 나의 받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 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50)

여기서의 세례라는 것은 분명히 예수의 죽음을 가리키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라는 단어의 참 의미는 나에게는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책에서 참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

그전에 할례가 세례가 된 것은
할례만 가지고 아브라함의 제자라고 교만에 빠졌던 유대인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 위함의 목적이 있음도 깨달을 수 있었다.
(골 2:11-12)

첫째로 세례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인치는 것이다.
(요 4:1 –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하는 말을..)
(마 28:19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세례를 주고)

두번째로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세례를
받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징할 뿐이다.
(고전 1:13, 마 3:14-15) 위의 난해했던 두 구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깨달아 졌다.

세번째로 세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치는 것이고(롬 4:!1)
마지막으로 세례는 성결케하는 것이다. (행 22:16, 엡 5:26, 요15:3, 히 10:22)

세례가 제자됨을 인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새로왔고
내가 그러한 세례를 아무 생각없이 받았지만 이제서라도 깨닫고 나니
그 의미과 감동이 더 깊어진 것 같다.
나는 예수의 제자로 인쳐진 것이다.

첫번째 퀴즈

예수님께서 제자들하고 갈릴리 바다를 지나실때
바다는 폭풍이 휘몰아쳐서 다 죽게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주무시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보고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시지요..

그냥 보면 아무 문제 없는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갑자기 위험에 닥친다거나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경우도 믿음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것이 믿음의 행위인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위의 이야기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퀴즈입니다.

———-
99.3.25

뭐.. 정답은 아니고 제가 내린 답입니다.

이건요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깨운것 자기에게 도와달라고 한 것을 가지고
그들을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신 것을 보아

그들이 예수님에게 구하면서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을 가지고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기도는 해야 하지만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