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의 사랑이라
말합니다. 이 말씀을 마음속으로 묵상하면서
아! 그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
다. 오히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보여진 독생자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사
랑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앞에 드렸을 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네가 네 목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줄 알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항상 이야기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뜨거운 사랑은 잊어가고 있지 않은가 돌아봅니다.
아들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날 안아준 친구
레크레이션 지도라는 수업을 듣는다.
..같이…
그곳에서 만난 한 친구가 있다.
조..라는..신과대 99학번 아이다.
같은 조가 되어서 자주 부대끼고 잘 아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다지 맘에 들이를 않았다. 99학번 이면서
선배들한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반말을 툭툭하는가 하면
담배도 피고.. 그냥 신학과라는게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런 아이였다.
한번 길을 가다가 나를 만났는데
야.. 대출 좀 해줘라.. 라고 대뜸 그래서 아주 황당한 일이 있었다.
레크레이션 지도의 수업 과정 중에 캠프를 1박으로 가는 시간이 있다
엊그제 4일-5일에 다녀왔다.
그 아이와 또 같은 조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아이를 아주 따뜻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저녁 시간.. 캠프화이어를 하는 시간에 ‘참회의 시간’이라는 게 있었다.
스티로폼을 하나 가운데 놓고 조가 둘어앉아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준 일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조 인호라는 그 아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며 하나씩 하나씩 꽂기 시작하는데
사람은 보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어떤 사람을 용납해 주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한다면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런 것을 느꼈다. 아주, 순수하고 선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날 저녁 ‘축복의 시간’이라는 시간에 서로 떡을 떼어 먹여주는 시간
이었는데 그 아이에게 가서 떡을 주며
내가 그 때 마음이 어땠다는 이야기를 했고
기도를 해 주었다.
저녁에 교수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아이와 3명이서 있게 되었다.
그 아이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 1 때 신학에 마음을 두었다고 하고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본 이야기 등등을 들었다.
재수를 했으니 .. 나와 같은 나이인 셈이다.
다음날 캠프를 끝내며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할 때에 그 이야기를 했다.
이 캠프를 와서 내가 사랑하게 된 한 친구가 있다고
처음에 아주 좋지 않게 생각했던 이야기,
다시 그의 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이야기 했다.
나는 책을 통해 배웠다.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었다. 나도 사람들 앞에서 어떤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를 함으로 인해서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나도 한번 써먹고 싶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왜냐면 나는 그 아이한테서 선배인양 행세하며
그날 저녁 기도해 줄때 후배다루듯이 했던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까지도 한살 어린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레크세이션 수업에 들어갔는데
교실 밖에서 날 보자
그 친구가 반갑게 끌어안아 주었다.
별 일 아닌듯 지나쳤지만 마음은 참 기뻤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와의 우정을 드러내는 일은 참 귀하다.
배워만 왔던 그 일들이 생각대로 이루어 져 준 것도 참 감사하다.
많은 걸 배우고 얻었다.
그냥…
별 일 아니었지만…
솔로몬의 영광과 한송이 백합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28-29)
하나님께 모두 내어 맡긴 들의 핀 한 송이의 백합화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던 솔로몬 조차도
그 꽃만큼 아름답게 옷을 입지 못하였으니.
하나님께 모두 내어 맡긴 들의 핀 한송이의 백합화가 말이다.
스피노자와 죽음
스피노자의 “윤리학” IV, 67. 정의 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는 최소한으로만 생각한다. 그의 지혜로움은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닌 사람에 대한 숙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대해서 되도록 생각하지 않
는 것만이 현명한 일일수 밖에 없겠지만은
우리는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복되고 영광스럽고 즐거운지요.
죽음 앞에서는 어떤 철학자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정에 대하여
저는 항상 내 신앙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그러나
그것은 내 신앙이 줄어들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기준이 높아졌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신앙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어떨때는 저의 느낌으로 내가 참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그런 생활을 요즘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그 때만큼 저의 신앙이 뜨거웠던 때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막쪄낸 찐빵같은 그런 열심을 바랄 때도 있지만
지금 나의 감정이 식었다고 해도 나는 더 기쁩니다. 왜냐하면 나의 감정이
식은 것이 나의 믿음이 식은 것을 꼭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시간에 가끔은 눈물을 흘리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더
깊은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된 마음으로 나아가도
눈물이 안나오면 안나오는 것입니다.
나와도 나는 그것이 진실된 예배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마음이 피상적인 것에만 머물렀다면
나의 예배는 나의 감정충족에만 그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은 사람을 헛갈리게 만들고
영적이지 못한 일들을 영적으로 위장하게 만들고
영적인 일들을 영적이지 못한 것으로 만드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감정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감정을 지극히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변하는 것이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 보고서도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즉각적으로
발동하여 그 감정을 묵살해 버립니다. 처음 갖게되는 매력은 외모를 보고 사랑하
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묵살해 버립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시간을 두고
그 때의 감정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돌아봅니다.
그러면 조금 지나지 않아 그 감정은 사라져 버립니다.
사랑은 아무런 감정이 없을 때 비로소 참된 모습을 드러냅니다.
감정은 사랑을 위장하며 무감각은 사랑의 본질을 보이지 않도록 눈을 가립니다.
감정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실제는 감정과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심장을 나도 갖고 싶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갖고 싶고,
죄를 극도로 미워하는 마음도 갖고 싶고, 영혼을 지극히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지 그런 감정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런 감정을 갖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싶다
는 것은 나의 인격이 나의 사고가 나의 행위 전반에 있어서
그런 모습으로 다듬어져 가고 싶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아무런 감정이 없어도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있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도 나는 죄를 미워할 수 있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도 나는 영혼을 안타까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실제가 변화하고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영원하지 못하고,
언젠가 그 감정이 없어졌을 때 자신에 대한 실망감만을 가져오지만
나의 실체가 변화하였을 때에는 그런 감정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할 때 눈물이 나면 영적인 사람이고
눈물이 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해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이미 십자가는 나의 삶 속에 스며들어
삶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아침이 몇번 일어나면 힘이 들지만
계속적으로 반복하면 저절로 일어나 지게 됩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서 매일마다 고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나의 생활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져서 아침에 일어나도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을 더 사모합니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