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2장

사무엘상에 이어 열왕기상은 다윗의 말년으로부터 시작하여 솔로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다윗은 늙고 기운이 없는데 그 틈을 타서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자기 스스로 왕이 되려고 높인다.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5절)
스스로 낮춘 요나단의 모습과 스스로 높이는 아도니야는 극한 대조를 이룬다. 아도니야는 훌륭했다. 그는 왕이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넷째 아들이었지만 압살롬이 죽고 그는 살아있는 다윗의 아들중에서는 최고 형이었다. 그 당시 풍속으로는 그가 왕이 되는 것이 옳다. 그리고 그는 용모 준수하고 행동도 평소 바르게 해서 다윗왕의 신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신다. 왕을 결정할 권한은 하나님에게 있었다.

다윗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하는지 관심도 없었고,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일도 미루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나이가 많아 신경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순종키 위해 솔로몬을 왕으로 세워야만 했다. 그 때 그 사실을 기억하게 했던 인물이 바로 나단이다. 나단같은 선지자가 있었기에 다윗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지혜로왔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왕에게 바로 전할 줄 알았다.

그리하여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다. 다윗의 범죄로 낳은 아들 솔로몬. 그가 왕이 되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도니야의 반란은 압살롬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 깨달았다. 그는 제단뿔을 붙잡고 용서를 구했다.그리고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자기 종들의 목숨도 구해달라고 햇다. 솔로몬도 그를 용서했다. 자신의 형이었다.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될진대 내가 머리카락 하나도 건들지 않겠다. 그러나 악한 일을 하면 바로 죽일 것이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비극으로 삶을 마친다. 바로 아비삭을 구한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아도니야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서라기보다는 일시적으로 목숨을 부재하기 위해서 제단뿔을 잡은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지극히 싫어하신다. 스스로 높여서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왕은 세워졌다.

왕상 1장의 제단 뿔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현대어 성경을 보면

아도니야도 솔로몬이 두려워서 홀로 일어나 성막으로 가서 제단의 네모퉁이에 돋은 뿔을 붙잡았다. 아무리 살인자나 천하의 죄인이라 해도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제단 뿔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목숨이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아도니야에게 `성막에서 나가시오’라고 하자, 그는 `솔로몬이 두려워서 제단 뿔을 놓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가 제단 뿔을 잡고 관대한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왕에게 전해졌다. `아도니야는 왕이 나를 죽이지만 않겠다고 약속해 주면 이 제단에서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라고 나와있다. 제단 뿔 네 귀퉁이는 어떠한 죄인이던지 보호받는 피난처이다.
출애굽기 20장에는 제단에 대한 규정이 나온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제단은 돌로 쌓을 수 있었지만 다듬은 돌로는 쌓을 수 없었다. 또한 계단을 만들 수 없었다. 이는 다른 우상의 제단과는 전혀 다른 차이였다. 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으며 그 제물을 통해 속죄가 선포되었다.




열왕기상 2장

2003.4.1

아도니야의 왕권 찬탈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다
다윗은 40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죽으니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다윗의 유언은 역대상과 비교해볼 때 사무엘상에서의 관점은 좀 다르다
역대상은 그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것에 대해서 솔로몬에게 집중적으로
이야기 하는 면을 다룬다.
그러나 열왕기상 2장에 나오는 그의 유언은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징벌과
돌봄을 부탁하는 것을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다윗의 유언은 세가지이다.
1. 요압에 대한 징벌
2.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 대한 선처
3. 시므이에 대한 보복

다윗은 생전에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면서, 스스로 원수 갚는 것을 도전으로 여겼다. 따라서 일견으로 그러한 다윗의 면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유언은 그의 신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2장에서는 필요하다.

첫번째로 요압에 대한 다윗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았다.
다윗은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에게 행한 일에 대하여 그를 편히 죽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고 솔로몬에게 이야기 한다.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그에게는 조카뻘 되는 관계이다. 먼저 그가 죽인 아브넬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 총사령관으로서, 골리앗을 죽이겠다고 한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온 인물이기도 하면서, 사울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사울이 죽고나자 그는 사울의 살아남은 넷째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위에 앉히고 다윗의 군대와 기브온 전투를 벌인다. 여기서 그는 요압의 형제인 아사헬의 추격을 받게 되고, 그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자, 창으로 찔러 죽인다. 이것은 정당방위였다고 이해해야 한다.

아브넬은 비록 사울의 군대장관으로 있었으나, 충직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사울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옮겨갈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것에 동의했다. 그는 다윗의 신하인 요압과의 화평을 위해서,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을 결코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사울에 이어 왕이 된 이스보셋이 자신을 사울의 첩을 통간했다는 혐의를 덮어씌우자 결국 이스보셋을 버리고 다윗에게 신복을 보내 그의 편에 가담하려고 했다. 후에 다윗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가는데 그 때 요압은 속임수를 써서 아브넬을 죽인다.

요압의 아브넬 살해.
요압은 다윗에게 아브넬이 스파이 노릇으로 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에는 요압이 동생 아사헬을 죽인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분명 이것에는 요압의 정치적인 야욕이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아브넬이 다윗의 편에 가담한다면, 그는 다윗의 신임을 받아 자신의 군대장관 자리를 위협할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요압은 그런 아브넬에게서 분명 경쟁의식과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브넬 살해는 전쟁 중의 불가피 한 것이 아닌 분명 보복, 살인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놓고 심히 가슴아파했다. 내 생각에는 다윗이 아브넬을 만나고 그의 신앙적인 모습과 인간적인 면모에 깊이 빠져들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별로 없는 듯하다.

다윗은 이 일로 당시 요압을 심각하게 저주했는데, 바로 벌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요압과 아비새 형제를 징벌할만한 힘이 없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군대장관으로서 그의 자리가 중요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는 여부스를 징벌하고 암몬 아람 연합군을 처부수는 등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또한 밧세바 남편 우리아 살해를 공조하기도 하였고, 에돔 정복에도 가담했다. 요압의 공로는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면은 날카로워보인다.
그는 반역자 압살롬을 처형했다. 다윗은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하라고 그의 신복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정쟁중 한 사람이 요압에게 압살롬이 나무에 달려있다고 보고하자, 왜 그를 죽이지 않았느냐고 책망하고 직접 자신이 가서 창으로 심장을 찔러 죽였다.
다윗은 그의 죽음을 듣고 매우 슬퍼했다. 그리고 이 참에 요압의 자리를 뺏고 아마사를 대신 군대장관으로 지명하려 했다. 여기서 요압은 다시 아마사를 죽이는데, 아브넬과 같은 이유였다. 다윗이 그를 군대장관으로 지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요압에 대한 처신은 무리가 없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요압은 수많은 피를 손에 흘린 살인자였다.

2. 바실래의 아들들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하여 망명했을 때 다윗과 군대에 식량을 지원했던 사람이다.

3. 시므이
그는 압살롬의 난 때 다윗과 신복들이 바후림을 지날 때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신랄하게 저주한 인물이다. 그는 사울왕에 대한 충정에서 그러했을 것이다. 반란이 진압되고 시므이는 다윗이 환궁할 때 그에게 용서를 빈다.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가 그를 죽이라고 했으나 다윗은 용서한다.
다윗은 아마도 시므이가 솔로몬의 왕위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므이는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므로 그 죄를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나 다윗은 그를 용서한 바 있다. 다윗은 그를 지혜롭게 처리하라고 명했고 솔로몬은 다윗의 말을 지켜 그를 처리했다.
역시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처리도 어떤 한도를 뛰어넘지는 않는 것 같고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되자 아도니야는 아비삭을 아내로 맞아들일 계교를 꾸민다. 그러나 그것은 솔로몬에게 간파되고 그는 죽임을 당한다. 아비삭이 아름다워서 였을지도 모르나, 그는 여전히 아비삭으로 인해 자신의 왕좌 계승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관습으로 선왕의 후궁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왕좌를 계승할 수 잇는 권리가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한 명령에서도 나타난다.(삼하 16:21)

또 솔로몬은 아비아달의 제사장 직분을 박탈한다. 그는 엘리 가문의 5대손으로 엘리-비느하스-아히둡-아히멕렉-아비아달의 계보이다. 엘리는 망나니 같은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하는 짓을 막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문의 저주를 받는다. 그의 후손은 제사장 직을 영원히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울이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모두 살육하면서 성취되었으나, 대량학살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아비아달이었다. 그는 아도니야의 반란에 동참해서 결국 쫒겨났으니 그 저주가 완전히 이루어진 셈이다.

솔로몬은 브나야를 새로 군대장관으로 삼고 요압을 처형하라고 명한다. 요압은 아도니야처럼 제단뿔을 잡았지만, 바로 최후를 맞이한다.
32절을 보면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대장관 아브넬 유다 군대 장관 아마사’ 라고 한다. 분명 아브넬은 의롭고 선한 부류의 믿음있는 신하였다고 생각된다. 그가 죽인 것은 분명 둘 다 군대장관들이었으니 그의 야욕이 바로 드러나는 구절이다.

또한 시므이도 죽임을 당하였으니
다윗의 솔로몬에 대한 부탁과 이루어진 모든 결과가 2장 한 장에 다 이루어진 셈이다. 모든 반란까지 제거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평화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은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렸으나 솔로몬의 시대에는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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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의 내용은 어려웠다.
사무엘하를 다시 대부분 읽어보아야 했다. 특히 아브넬의 살해장면과 압살롭 반역하고 아마사가 살해되는 장면을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 공부에서 주된 성과는 아브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또한 사무엘-열왕기와 역대상하 의 차별성에 대한 인식이다.
다윗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았고 부당하게 보복하지 않았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사랑받는 자로서 왕위가 잘 계승되었다. 지금까지 내용은 너무나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최후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

마태복음 5장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갈릴리에 이르셨을 때 수많은 무리를 산에 앉혀놓고 하신 말씀이다.

오늘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1.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라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뒤에는 무슨 말이 나올까?

답은 이것이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은
하나님 스스로를 나타내신 것이다.

어떤 신학자가 이런 식의 비유를 했다.
내 기억으로는 조나단 에드워즈로 기억한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개의 아들은 개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사람이 낳은 아들은 사람으로서의 character 를 지닌다.
따라서 하나님의 독생(only one)자이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character 를 지니신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그가 세상에
나타나심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은 임마누엘 (God with us) 이신 것이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듯 추상적인 의미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입고 행하셨다.
사람들과 함께 거하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분이었다.
그분을 본 사람은 없었다. 모세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나
얼굴이 아닌 등만 보았다. 다른 이들은 그분의 영광을 두려워서 접근하지도
못했다. 정결하지 못한 인간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광(얼굴)을 본다는 것은 곧
자기 죄로 인한 죽음을 의미했다.
디모데전서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고 또 볼 수 없는 자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달라졌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특이하게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셨다.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에 눈에 보이게 함께 생활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그를 본 자는 다 하나님을 본 자들 이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했을까?



2.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자들인가?

그럼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본 것인가?
육적으로는 그들이 다 눈으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을 보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청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먼지가 자욱히 끼어있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안개가 자욱한 길에서 50m 정도 떨어진 사람을 보거나
또는 먼지가 낀 안경, 거울로 다른 사람을 본다고 생각해보면
절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든 것처럼, 마음의 청결함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으나,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다.
일종의 편견이다.

그렇다면 그들앞에 끼어있던 먼지는 무엇인가?
바로 그들의 메시아와 관련된 편견이다.
유대민족은 다른 외부의 침략과 고통으로 당시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민족적 괴로움을 겪고 있었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의 식민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기름부은자, 왕으로 오실 다윗의 자손을 바라고 있었는데, 바로 그 기름부은자(메시아)가 유대민족을 로마나 다른 외세로부터 구원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강력한 왕권으로서 유다를 통치할것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마치 성경(구약)은 그런 메시야를 보내줄 것을 약속한 것처럼 보였다.

세례자 요한이 인정한 예수님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그가 행하는 이적은 그를 메시야로 증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안식일을 범하고 있었다. 요한과 달리 포도주도 마셨으며, 죄인들, 세리들을 가까이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로마 권력에 대해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반된 사실은 혼란을 가져왔다.
예수는 누구인가? 과연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아인가?
예수님에게 특별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왜 빨리 로마로 부터 저항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강력한 나라를 세우지 않는지 의아해했으나 언젠가는 그렇게 할 것으로 믿었다. (서로 큰자리 차지하겠다고 싸운 것도 그들이었다.)
베드로는 그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으나, 그도 잘못된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왜 예수님이 나는 죽어야한다고 말씀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월절이 가까워오자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과 무리는 기대감에 부풀어올랐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
군중은 극도로 흥분했다.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들은 기대하던 메시아가 도래한다고 생각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는 것은 로마에 대해 반군을 일으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징조가 아닌가?

그러나 그분은 말이 아닌 나귀를 탔다. 말은 전쟁의 상징이나, 나귀는 반대로 평화의 상징이다. 그분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군중들은 또다시 실망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기미가 안보인다. 왠지 속은 느낌이 든다. 저 사람이 과연 그럴 의도가 있는 걸까.. 도저히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안든다.
군중은 화를낸다. 뭐하러 왔냐.. 십자가에 못박아라
순식간에 태도는 돌변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들이 원하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메시아인지 반신반의하던 어떤 이들은 그래 십자가에 달아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설마 진짜 메시아라면 거기서 죽진 않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들은 예수를 보았으나, 그가 하나님이며, 그가 하는 일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민족을 구원하고 유대인, 이방인의 벽을 허문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러 오시기 위한 분임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교만과 선민의식으로 인해,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여겼으므로, 예수님의 구원의 보편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들은 분노하며
‘왜? 니가 메시아면 한번 자신부터 십자가에서 구원하고 뛰쳐내려와봐라..’
라고 욕을 했던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수많은 천사를 보내어 사태를 뒤집으실 수 있었지만
이사야서 말씀과 같이 털깎는 자 앞에서 어린 양처럼 잠잠하셨다.
그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백성들의 죄를 짊어져야할
사명을 가지고 이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욱한 안개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거기 마음이 청결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 옆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행악자였다.
두 행악자중 한명이 ‘니가 메시아라면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좀 구원해봐라’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다른 행악자가 말한다.
‘임마 너나 나나 우리가 잘못해서 십자가에 달렸지만,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나?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좀 생각해주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실로 엄청나고 놀라운 고백임에 틀림없다.
그 행악자는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눈치를 챘다.
그는 죄가 없었으나 십자가에 달려있다.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온갖 병과 귀신에서 구원했지만 자신은 구원하지 않고있다.
그의 능력과 말씀은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것은 그는 날 좀 십자가에서 내려주십시오 라고 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알았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 나라는 존재할 것을 알았으며, 예수는
그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실로 찾기 힘든 믿음이며
어떤 유대인도 그런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비교해봐야한다. 예수님의 이적과 권능을 누구보다 많이 보았던
그분의 측근들을 포함한 12제자와 모든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자신들의 기대가 무너지자 다 뿔뿔히 도망갔다.
그렇게 위대했던 사도들도 저 흉악범의 믿음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조차도 의심했으며,
부활 후의 그리스도의 설명, 성령의 증거를 통해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말씀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을 본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 결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죄인,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모두 메시아가 그들을 자신들의 고통에서 구해주기를 바랐고
그런 고통을 구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화를 냈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했던 사람,
메시아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이해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이 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역들을 하고 계심을
인정할 줄 알았다.
영화 오만과 편견을 봤는데 이 영화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때
얼마나 쉽게 편견에 빠지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하물며 인간이 다 이해하지 못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볼 때 얼마나 더
많은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대하기 쉽겠는가?
그 때 자신은 하나님의 방식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아가야한다.

살다보면 때로 저 성경 속의 유대인들과 십자가의 흉악범들처럼 고통과 고난 속에 하나님을 찾을 때가 있다.
새로운 나라를 일으켜달라고, 십자가에서 내려가게 해 달라고 우리는 하나님
께 구하곤 한다.
그러나 때론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에게 등을 돌리신 것처럼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지속되며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기도도 응답되지 않으며, 모든 원하는 일들은 거꾸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닌가?
하나님은 기도를 듣는 분이 아닌가?
성경에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그 길이 평탄해야한다고 하지 않는가?
왜 십일조를 해도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시는가?
왜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가? 하나님은 진정 무관심한가?
이런 의문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신앙으로 접어드는 경우도 생긴다.
욥도 그랬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던 욥이나, 그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임을 놓지도 않았다. 그는 시험을 통과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심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먼지, 안개와 같은 것이다.
그것들을 제거한 자는 투명하고 청결한 마음을 가진다.

그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비록 고통과 고난 중에 거할지라도
다윗처럼, 욥처럼,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본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까?
왜 전쟁과 고난과 굶주림, 고통, 미움, 악의, 손해가 찾아오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분의 일을 인정하는 자세야 말로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의 자세이다.

전도서 6장

사람이 비록 장수하여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하여도 인생의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슬기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다 같이 밥을 얻어 먹으려고 평생토록 애쓰지만 만족을 얻은 적은 한번도 없는 것같이 보인다.
인생의 우여곡절은 어느쪽에나 다 있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슬기롭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좋은 인생을 누린다.

그림자처럼 덧없는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가장 잘 살아가는 길인 줄을 누가 과연 알 수 있겠는가 ?
사람이 죽은 다음에 이 세상에서 벌어질 일을 누가 과연 일러줄 수 있겠는가 ?

전도서 6장 6절과 12절 말씀…
아멘..

빌립보서 1장

빌립보서 1장에서
과연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2-18)

여기서 질문은 이것이다.

1.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은 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옥생활에 괴로움을 더해줄 것으로 생각했을까?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해석한다.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은 주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쓰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에 애씁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잘 해내어 감옥에 갇혀 있는 내가 속상해하고 질투하게 만들려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속좁은 인간이어서 감옥안에서 그들을 질투하게 만들려고 그들은 그런 동기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은 상황적인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적절한 해설을 찾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는 현대어 성경이 해석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 최선인듯 하다.

2. 이것은 그릇된 동기로 하는 행동에 대해서 어느정도로 정당화 해주는가?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기뻐한다고 했다.
이 구절은 그릇된 동기로 하는 바른 행위에 대해서 얼마나 뒷받침해주는가?

두 부류의 사람의 복음을 전하는 동기는 하나는 바울을 사랑해서이고, 하나는 바울이 시기하게 만들기 위해서 였다.
성경은 그릇된 동기로 하는 행동에 대해서 다른 언급하는 구절이 별로 없다.  한 가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너희 의를 행치 말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한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는 주어질 상이 없다.
이것은 어떤 선한 일을 했는데 의도치 않게 다른사람에게 드러나버린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인 의도로 드러나는 것,즉 드러날 것이 예상되는 행위(금식하고 인상을 쓴다던지)는 해당된다.

바울의 입장은 관대하다. 그들에 대해서 복음이 전해진 결과를 기뻐한다고 한다. 그런식으로 전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옥에 매여 있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복음 전파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기쁘다.

따라서 이들의 행위는 예수님꼐서 말씀하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바리새인들의 동기와는 또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옳다고 본다.

그러나 이들을 향한 묘사를 보면 긍정적인 묘사는 아니다.
투기와 분쟁(경쟁심)으로,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부정적인 시각이다.

바울이 옥에 매여서 복음을 증거하는데 겉으로 보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바울과 경쟁하려는 마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박차를 가했을 수 있다.

그들의 동기는 불순하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라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듯하다.

3. 이것이 선교단체들이나 교파간 혹은 교회간의 경쟁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을까?

‘어느 정도의 경쟁심’은 비록 불순하기는 하지만, ‘선한 결과’가 나타나는 경쟁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쟁이 ‘상대에 대한 비방’이나, ‘남 잘되는 것을 못본다던지’, ‘자기가 드러나기만을 바라는 경쟁’이라면 그것은 분명 크게 잘못된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합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증거하는 힘을 지녀야 한다. (요 17장) 이 연합 안에서의 어느정도의 경쟁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선한 경쟁이 잘못된 행위의 결과로 드러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살펴야 한다.

4. 바울에 반응에 대해 배울 점

바울은 이로서 자신은 기뻐한다고 했다. 이것은 그의 넓은 도량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오히려 그들의 복음 전파에 대해 비방하고 불순하다고 그런짓 하지 말라고 했다면 그도 마찬가지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의 복음 전파의 일을 존중해주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불순한 동기로 복음 전한 자들의 의도 (바울로 시기나서 괴롭게해주려는 것)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바울은 내가 전하든 다른 사람이 전하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할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녔다. 그런 점은 바울을 괴롭게하려했던 자들의 자세과 분명히 대조적이다.

결론

1.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느 정도의 경쟁심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

2. 경쟁심이 발전하여, 상대에 대한 비방, 질투, 자신을 드러냄, 연합의 깨어짐으로 발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3. 선교단체간의 경쟁은 선한 결과가 드러날 때 허용 된다. 그러나 자신의 단체에 대한 우월심, 상대단체에 대한 비방과 소모적인 싸움으로 교회의 연합을 해치는 일이 되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

4. 그러려면 바울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다른 사람들의 성과를 평가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달란트와 므나 비유

오늘은 학교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찾아 읽으면서 달란트와 므나 비유를 연구했다.
이 비유 연구는 내가 하나님의 주신 달란트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 비유가 정말 그런 것을 의미하는지 고민하던 그 고민을 해결하고자 시도된 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나의 진로 결정에 관련이 되는 말씀이다.

먼저 본문을 살펴본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비유이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25: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25: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25: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5: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5: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5: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5: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5: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5: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또 므나 비유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온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9: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9: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9: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9: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9: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9: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19: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19: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19: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19: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19: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19: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19: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9: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자 여기서 내가 고민했던 질문들과 내가 얻었던 답변들이다.

1. 이 비유는 구원받은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인가? 아니면 구원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인가?

두번째라고 가정해보면 여기서 엄청난 문제에 부딪힌다.
이것이 맞다면 달란트와 므나를 늘리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중요 교리인 이신칭의 교리와 전적으로 대치된다.
첫번째라고 생각한다면 비유 마지막 표현이 눈에 거슬린다.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이다. 이것이 지옥에 떨어진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구원 받은 자가 이럴 수 있을까…
두가지가 다 어려움이 있으나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첫번째 가정을 옳다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누리지 못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3장말씀과 같이 불 가운데서 구원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마치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처럼 과장되게 들릴 수 있는데, 그것은 구원은 얻었으나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참예하지 못하는 사람의 슬픔을 심각하게 묘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또한 이런 식으로 해석할 때, 주인이 왕됨을 원하지 않던 사람들.. 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고, 그들을 잡아 죽이라고 한 것과 있는 것마저 빼앗긴 것과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또 이 비유에서 종들이라는 표현을 이미 믿어서 구원에 이른 그리스도의 제자들.. 에 비유할 수 있다.

2. 달란트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달란트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직접적인 해설은 성경에 결여되어 있으나 정황적으로 어느정도 이해해볼수는 있다. 예를 들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재능’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다면 몇가지 난제가 따른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능력은 또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므나비유에서는 같은 양의 므나를 준다. 이것또한 달란트 비유와 대치되므로 이해되기 어렵다. 그리고 주는 것이 달란트로 모두 똑같다. 양만 다를 뿐이다. 만일 재능을 가지고 비유할 것이라면 사람들마다 가진 재능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종에게는 돈을 맡기고, 어떤 종에게는 밭을 맡기고, 어떤 종에게는 양떼를 맡기고 이런 식의 비유가 되었어야 한다.

두번째로 제자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렇게 보기도 어렵다. 만일 달란트가 성령의 은사라면 5달란트와 2달란트 1달란트를 준 것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 은사들의 양이 다른지? 고린도전서 12장에는 각기 은사의 종류는 다르지만 그것이 양의 차이로 설명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그들이 달란트를 가지고 달란트를 남겼으므로, 은사들을 개발시켜 더 많은 은사들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야하는 것인지가 어렵게 된다. 만일 은사들이라고 했다면 달란트를 가지고 여러가지 선한 사업에 사용하여야 했을 것이지 달란트를 불리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들려진 이 말씀을 제자들이 달란트는 성령의 은사이다라고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세번째로 그들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의미할 수 있다. 난 이것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샤이먼 키스트메이커의 해설에 의하면 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보존하려고만 하였다. 하나님의 계시의 부유성을 나누는 일은 등한시 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율법을 보존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주는 데만 급급하였다. 세번째 종의 태도는 율법에 대한 미쉬나의 가르침과 연결된다. 율법의 소유는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시키는 특전으로서 율법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큰 기쁨이었고,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세번째 종의 행동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해석은 달란트의 양이 다르거나 같은 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 그들에게 달란트를 준 셈이다. 그들은 이것을 묻어둘 것이 아니라 전파하여서 그 말씀이 더 풍성히 나누어지도록 해야할 책임이 있었다.

3. 이 비유는 우리가 재능에 맞는 직업을 선택할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가?
위의 설명에 의해 전혀 그렇지 않다.

4. 왜 5달란트(현재 돈으로 수억-수십억원에 이른다)나 되는 큰 돈을 배로 불린 것이 작은 일인가?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 것을 맡기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은 흔히 해석하는 것처럼 인생의 보잘것 없는 일에 충실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말 그대로 들어쓰시겠다는 말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인데 그 때 무슨 큰 일을 맡기신다는 것인가? 그 때는 이미 우리의 인생도 끝난 뒤이다.

그러므로 큰 것으로 맡긴다(카타스테소 – 맡기다, 임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에 주실 하나님의 상이 크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므나 비유에서 열고을 다스릴 권세를 준다는 것은 더 큰 일을 맡기는 것과는 다르다. 만일 더 큰 일을 맡기는 것으로 해석하려면 1므나로 10므나를 남긴자에게 100므나를 맡긴다던지 해야 한다. 그러나 왕은 그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열 고을 다르실 권세를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지위, 받을 유업, 상급 등으로 이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했을까.

첫번째로 이것은 그가 받을 상급에 비해 지극히 작은 일일 수 있다. 그가 한 일에 비해서 그가 받는 상급은 대단히 크다. 5달란트로 5달란트를 남겼지만 그것은 주인의 재산이다. 그러나 주인은 그에게 10달란트 모두를 준다. 그리고 더 많은 것으로 그에게 더해준다.

두번째로 부유한 주인의 재산에 비해볼 때 5달란트는 지극히 작은 것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의미할 수 있다.

5. 세번째 종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주인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이유가 아닐 것이다. 종은 자신이 이익을 남겨봐야 주인이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만일 손해를 보면 자기가 변상할 것이라고 보았다. 주인은 그런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주인의 직접적인 책망의 이유는 아니다. 주인은 그 종에게 내가 만약 그렇다고 쳐도 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까지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며 호통을 쳤다. 주인의 호통의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

둘째, 많은 돈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일 수 있으나 직접적인 이유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주인은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했다. 이 말은 종이 주인의 재산의 증식에 대해서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만일 종이 돈을 손해를 봤다고 해도 그 돈을 늘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과 성실함을 보였다면 주인은 그를 칭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인은 종에게 네가 정말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았느냐? 라고 반문하는 데 이것은 주인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주인은 오히려 남긴 자에게 그것을 도로 빼앗아 간것이 아니라 그를 칭찬하며 그에게 그 이익을 모두 주었다. 주인은 종이 거둔 수익을 빼앗아가는 분이 아니라 종이 일하지 않고 남겨둔 것을 빼앗아 가는 분이시다. 따라서 종이 이런 주인의 마음을 읽었다면 이 돈을 잃어버리더라도 과감하게 투자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의 책망은 그의 결과보다는 그가 취했던 방식, 돈을 땅에 묻어두었던 안일함과 불성실함에 있다.

6. 만일 종이 여기저기 투자했다가 실수로 본전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위의 이유에 의해, 그래도 종이 성실하게 주인의 재산을 위해 일하고자 노력했다면 그는 칭찬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론,

1. 달란트와 므나비유는 우리가 타고난 재능대로 살아가야 할것을 전혀 암시하지 않는다. 달란트는 타고난 재능을 의미하지 않는다.

2. 따라서 우리는 재능대로 살지 못하면 책망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비유 또한 전혀 아니다.

3. 달란트와 므나비유의 관점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묵묵히 가지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증거하는데 자신을 드려야 함을 가르친다.

4.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노력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이 주어짐을 가르친다.

5.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불시에 이루어짐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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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의 해석 연구는 나에게 커다란 확신을 주었다.
나는 이전과 같이 선교와 내 재능과 관련이 없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할 이유가 없어졌다. 다만 아직도 지혜롭게 내가 어떤 식으로 사역할 것인지는 고민할 이유는 남아있으나, 만일 실패한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성실히 일하셨는지에 관심을 두고 계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역인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