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그림중에 아마도 내가 가장 오랫동안 쳐다본 그림들 중 하나
타오르는 듯한 나무 울렁이는 하늘, 난 이그림에서 화가의 상상력과 감성이라는 걸 가장 절실히 느꼈다
난 하늘을 이렇게 그린다는 것 자체가 마냥 신기했다.
———————————–
이 그림은 별이 빛나는 밤과 한 쌍을 이루고 있다.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을 이 그림과 함께 전시해야 한다고 동생에게 부탁했다. 이 그림은 ‘별이 빛나는 밤’의 대낮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한 쌍의 그림은 휘트먼의 시 모음 제목인 ‘대낮에서 별이 빛나는 밤으로(From Noon to Starry Night)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보리밭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삶이다. 고흐는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을 보며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까지 밀레의 그림이 표현해 주는 것과 같이 가슴 깊은 감명을 준 작품을 보지 못했다. 나는 ‘씨뿌리는 사람’ 앞에서 오래 오래 서 있었다’
고흐의 말이다. 씨를 뿌리고 자라나고 거두는 이 보리밭을 통해 그는 인생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고흐, 성서가 있는 정물
고흐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고흐는 아버지의 죽음을 추도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
꺼진 촛불을 죽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사야를 펼시고 있다.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옆에 있는 책은 에밀졸라의 삶의 기쁨.. 아버지에 대한 저항의식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 그림에 고흐 자신의 기독교와의 단절을 결심한 의도가 있다고 한다.
그의 내면의 알지 못하는 고독감은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일른지 모르겠다.
——————————————————-
위는 내가 고흐라는 사람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을 때 한 감상이다.
어떤 책은 이 그림을 이렇게 말한다.
이 그림은 고흐가 성서를 존중하고 있음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사야 53장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펼쳐있고, 그 옆에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있다. 얼른 보아도 고난 가운데 내재한 삶의 기쁨을 그린 것이 분명하다.
미술평론가들은 최근까지도 이 그림에 대하여 고흐의 아버지가 죽은 뒤 고흐는 성서와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을 분명히 대조시킴으로써 아버지를 자유로이 비판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그림은 오히려 고흐가 가졌던 전통적 과거 신앙(성서)와 현재 자기의 관심사인 근대 문학(에밀 졸라)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 둘을 종합하려 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근대 문학이 성서를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근대문학으로 보충하려는 것이다. 만일 성서를 졸라로 대치하려 했다면 닫힌 성서를 작게 그리고, 열려있는 삶의 기쁨을 성서보다 더 크게 그렸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흐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과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에 나오는 주인공 폴링을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일찍이 고흐가 탄광촌의 광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과 ‘슬픔의 사람’이요, 모든 고되고 힘든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고 설교하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화가가 된 뒤에도 여전히 숭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884년10월 고흐는 예수를 가리켜, ‘어느 누구도 아닌 화가로서… 산 몸 안에서 일하는 최고의 미술가’라고 하였다. 특히 고흐는 화가인 에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생 레미 요양원 시절에 그린 삐에따에 나오는 예수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그려 넣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성서에 이끌리고 있는지 넌 아마 잘 모를 것이다. 나는 매일 성서를 읽는다. 성서말씀을 내 마음 속에 새기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는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을 이해하려 한다.’ – 1877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Henri Nouwen
“고흐만큼 나에게 영향을 준 작가나 화가가 없었다. 깊은 상처의 사람, 놀라운 재능을 가진 고흐는 나 자신의 아픔과 재능에 다른 사람이 줄 수 없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흐는 나의 전 생애의 영적 인도자로서 나의 영적 생활을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학생들에게 고흐야 말로 신학적 성찰을 위한 참된 근원이 됨을 발견하도록 한 것이다. 고흐는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 뿐 아니라, 삶의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다. 그의 그림은 마음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고, 고흐는 언제나 한 목회자로 남아서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그가 회개를 촉구하고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이 사실이 바로 고흐의 그림이 지닌 깊은 우주적 호소력일 것이다. 고흐는 사람의 실패와 고난과 기쁨, 그 모든 것을 겪었고 또 그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그의 그림 속에 모두 표현했다.”
– Henri Nouwen
고흐, ‘첫걸음’
고흐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 생각한다. 밀레작품의 모작이지만… 밀레와 같이 그도 농민들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하던 아버지는 삽을 내려놓고 이제 곧 첫 걸음마를 떼려는 아이를 향해 두 팔 벌리고 있다. 아이도 아버지를 바라보며 같이 두 팔을 벌렸다. 아버지는 앞에서 아이를 반기고 어머니는 뒤에서 흐뭇한 모습으로 받쳐주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
인생은 과연 무의미한가? 인간은 이 세계에 이유를 모르고 태어난 외딴 섬인가. 우연히 만들어졌나. 인간은 기계, 분자들의 집합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이 세상은 인간을 위해 지어졌다. 인간의 삶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걸음을 떼는 아이의 모습은 사람의 일생중 가장 희망한 장면을 보여준다. 희망, 삶의 의미, 존재의 이유. 나는 고흐의 첫걸음에서 이런 것들을 발견한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이다. 고흐의 그림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찾아낼 수 있다니!
———————————
내가 고흐의 영성과 예술을 읽으면서 이 그림을 다시 떠올렸다. 고흐의 그림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에 가득한 삶을 바라보는 따스한 눈길, 농민의 삶 속에서 찾았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전형, 삶의 가치를 담아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밀레의 그림은 따뜻하기 그지 없다… 그림만 바라보아도 행복해질 것만 같다.
2002.4.18
———————————
넷 아트홀에서 퍼온 글…
이 작품은 고흐의 1890년 작품으로 밀레의 그림을 다시 그린 것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이지요. 한 아이가 처음 걸음을 내딛으려 하는 순간입니다. 주저하고 망설이면서도 무척이나 설레이는 듯한 아이 그리고, 아이의 첫걸음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함께하는 부모. 아주 행복하고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고흐는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답니다.
1889년 5월에 고흐는 생레미에 있는 생 폴 드 무송 정신병원에 들어가 그 곳에서 1년 정도를 보내게 됩니다. 고독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광기와 싸워야 했던 당시의 고흐의 그림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두려움과 슬픔이 짙게 배여 있습니다. 당시 고흐는 현실속의 사람들을 그리는 대신 밀레,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도미에등의 작품속 인물들을 다시그리곤 했는데요,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에는 두려움과 슬품 그리고 고독보다는 설레임과 행복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듯합니다. 힘들었던 시기지만, 고흐에게 자신과 똑같은 빈센트라는 이름을 가진 조카가 생긴 해 였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은 자신의 조카를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들의 행복을 빌면서 말입니다.
혹은 자신이 버렸던 크리스틴과 그녀의 아이를 생각했을까요. 평생 자신이 이루지 못했지만, 가슴 깊이 동경한 삶의 풍경일까요 어떤 경우든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고독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자신의 덧없는 인생에 한없이 슬퍼했을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밀레의 그림을 다시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고흐의 비극적인 개인사와 겹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보르헤스의 소설중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시 배껴 쓴 작품역시 위대한 작품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맥락을 강조한 것이리라 생각되는군요.
고흐라는 맥락은 이 작품을 한없이 아름답게도 한없이 울적하게도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고흐, ‘나사로의 부활’
<위 – 고흐, 나사로의 부활>
<아래 – 렘브란트, 나사로의 부활>
고흐의 성경을 주제로한 3부작 중 하나이다.
나사로의 부활..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 아닌가? 바로 램브란트의 그림, 나사로의 부활의 모작이다.
무언가 많이 다르다. 그가 밀레의 작품을 모사할 때는 똑같이 그렸다. 그런데 많이 다르다.
좌우가 바뀌었고, 예수님 대신에 태양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하나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나사로의 얼굴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넣었던 점이다.
아 우선 램브란트 그림을 보자.
절묘한 삼각형 구도를 이루었다. 그리고 삼각형 꼭대기에 예수님의 손이 있다.
권능의 오른팔을 드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빛이 비추인다. 나사로는 일어난다. 그는 4일 만에 일어났다. 몸에서는 썩은내가 났다.
램브란트는 나사로의 몸을 죽어져가던 모습 그대로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놀라는 여인의 얼굴이 빛난다. 마리아나 마르다 일 것이다.
나사로의 표정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고흐는 동생에게 자신은 렘브란트가 빛의 음영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것을 자기는 색깔 사용을 통해 이룩해보고자 한다고 하였다.
‘무덤과 시체는 보라색, 노랑, 흰색이다. 부활한 나사로의 얼굴에서 손수건을 걷어내는 여인은 초록색 옷에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고, 다른 사람은 검은 머리에 초록색과 핑크색 줄무늬가 잇는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뒤쪽에 푸른색의 시골 언덕이 있고, 그 위에 떠오르는 해가 있다. 이러한 색깔들의 배합이 그 자체로 빛과 그림자가 표현하는 시각적 효과를 보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색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고흐의 노란 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부활, 사랑을 대표하기도 한다.
태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흐가 태양신을 섬겼다던지, 자연주의로 회귀했다던지 하는 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3세기 이후 화가들은 태양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해바라기도 마찬가지이다. 해바라기는 전통적으로 경건과 헌신과 관련된다. 고흐는 태양을 그림으로서 믿음의 치유능력을 나타내고 싶었다.
죽어져가는 자신을 살려내실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