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정물화가 아닐까.
정물화라면 이쁘게 그리고 싶을 것인데.

고흐가 왜 해바라기를 즐겨 그렸는지 이유는 모른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는 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야할 해바라기들이 다 제각각 자기 앞을 보고 있다.
고흐가 무슨 의도로 그렸던지, 내가 보기엔 이 해바라기들은 그래서 저렇게 다들 고독하다.

렘브란트, ‘유대인 신부’


The Jewish Bride, 1665-67, Rijksmuseum, Amsterdam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감동적으로 그려낸 렘브란트의 그림. 어떤 책에선가 이 그림에 대한 감상을 읽었는데, 그 사람은 이 그림에 대해서 대단한 호평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남녀의 엄숙하면서 진지하고 따뜻한 얼굴 표정과 시선, 여인을 반쯤 감싸 안은 듯한 자세와 손길.

특히 반쯤 남자의 손을 덮은 여인의 손은 굉장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저 손이 내려가서 자기 두 손을 마주 잡은 모습으로 그렸다면 이 그림의 느낌은 완전히 다를 것이다. 반쯤 포갠 부부의 저 두 손이 이 그림에서 굉장한 감동을 느끼게 하는 포인트가 아닌가 한다.

한스 로크마커는 ‘ART – need no justification(기독교와 현대예술 – IVP)’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예술은, 주어진 삶의 위대성에 대한 경탄과 함께 성령의 적극적인 심성으로 나태는 등 실로 깊은 의미에서 기독교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 주제가 ‘기독교적’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은 그의 수난곡 못지 않게 기독교적이며,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 역시 그의 종교적 주제의 그림 못지 않게 기독교적인 것이다. 참으로 예술가에게 복음 전도자가 되라고 요규하는 것은 그가 예술의 의미,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다른 활동의 의미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는 자든지, 먹든지, 혹은 열심히 일하든지 항상 그리스도인이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다. 우리 기독교는 경건한 순간들, 종교적 행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목적도 복음 전도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인 것이다.

고흐, 밀밭과 사이프러스 나무


고흐 그림중에 아마도 내가 가장 오랫동안 쳐다본 그림들 중 하나

타오르는 듯한 나무 울렁이는 하늘, 난 이그림에서 화가의 상상력과 감성이라는 걸 가장 절실히 느꼈다

난 하늘을 이렇게 그린다는 것 자체가 마냥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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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별이 빛나는 밤과 한 쌍을 이루고 있다.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을 이 그림과 함께 전시해야 한다고 동생에게 부탁했다. 이 그림은 ‘별이 빛나는 밤’의 대낮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한 쌍의 그림은 휘트먼의 시 모음 제목인 ‘대낮에서 별이 빛나는 밤으로(From Noon to Starry Night)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보리밭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삶이다. 고흐는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을 보며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이제까지 밀레의 그림이 표현해 주는 것과 같이 가슴 깊은 감명을 준 작품을 보지 못했다. 나는 ‘씨뿌리는 사람’ 앞에서 오래 오래 서 있었다’

고흐의 말이다. 씨를 뿌리고 자라나고 거두는 이 보리밭을 통해 그는 인생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렘브란트, ‘엠마오의 그리스도’


Supper at Emmaus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이다. 엠마오의 저녁식사 그림. <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그날, 예수를 따르던 이들 중의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11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동네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예수께서 돌아가신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대체 무슨일이 있길래 그다지도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그들 중에 글로바라는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살면서도 지난 주간에 일어났던 그 끔찍한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단 말이오?”
예수께서 물으셨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께 있었던 일이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보인 예언자요, 권능 있는 선생으로 높이 존경을 받는 분이었소.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붙들어 로마 정부에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소.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이 난국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생각해 왔소. 이런 일이 있은 것은 사흘 전이었지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오.
그분을 따르던 우리 동료들 가운데 여자들 몇이 오늘 새벽에 그분의 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들만 보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소.
그래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달려가 보니 말한 대로였고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거요.”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렇게도 미련한 자들이냐! 너희는 예언자들이 성경에 기록한 모든 것이 그렇게도 믿어지지가 않느냐!
그리스도가 영광스런 자리에 앉기 전에 이 모든 고난을 당해야 한다고 예언자들이 명백하게 예언해 두지 않았느냐?”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모세의 글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해 놓은 구절들을 일일이 인용해 가면서
그 구절들이 무엇을 의미하며 예수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목적지인 엠마오에 거의 다다랐으나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시려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날이 저물었으니 그 밤을 자기들과 함께 묵어 가시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들이 식탁에 앉자 예수께서 떡을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 때에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 예수는 그들 앞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현대어 성경 눅 24장 13-31절)


이 그림은 저녁식사를 막 시작하는 찰나를 그리고 있다. 예수님의 손에 있는 것은 빵으로 보인다. 성경에는 빵을 떼어서 그들에게 줄 때에 그들이 눈이 열려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고 나온다. 다음은 윌터 엘 나란의 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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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란의 렘브란트(1606-1669)처럼 철저하게 자기의 그림을 성경 중심으로 그린 화가는 없다.
그의 수많은 그림과 조각은 신구약의 장면과 인물을 취급한 것이다. 성경은 그의 주요한 영감이요,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기 위한 도전이었다.
당시의 신학적 논쟁에 별로 관심이 없는 렘브란트는 구세주 자신 위에 자기의 신앙을 두었다.
그는 예수를, 낮은 자들 사이로 겸손히 다니시며,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시고,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사랑으로써 죄인에게서 죄의 짐을 벗겨 주시는 인자로 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가장 감명 깊은 걸작중의 하나인 엠마오의 저녁에서 보여 주는 예수이다.
이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존경하는 선생님의 비참한 죽음과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로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그가 주님이신 줄 몰랐으나 그는 그들을 만나 그의 죽음과 부활의 뜻을 설명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셨다.


저녁 때 엠마오에 도착하자 그들은 예수에게 머물러 식사를 같이 하시자고 청하였다.
그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실 때 그들은 눈이 열려 그가 누구이신 줄 알게 되었다.


그의 축사하시는 음성이 이 길쭉하고 침침한 방에 아직도 울리고 있다.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 모양으로 제자들은 좋은 주님을 바라다본다. 그의 온유하신 몸 전체가, 흑암의 심연을 꿰뚫는 것 같은 내부적 빛으로 빛난다.
이처럼 그들과 마주앉아 성만찬의 떡을 떼시며 무한한 위로를 주시는 그를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였을까!


오늘도, 어디서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그는 교제를 통해서 가까이 계시고 위로하신다.
부활절의 교훈의 중심은, 즉 살아 계시사 언제나 함께 하시는 그의 은혜를 통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그의 말씀의 진리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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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년의 이 그림<아래>은 더 극적이다. 예수님의 얼굴 근처에서 빛이 감돌고, 예수님을 알아보는 찰나의 순간의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듯 놀라는 사람의 표정
그리고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한 사람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그러나 약 20년 후에 그린 위의 그림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빛과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묘사에서 훨씬 위대한 작품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