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WV 106, ‘Actus Tragicus’


바하의 칸타타 ‘하나님의 시간이 최상의 시간이로다’

이 칸타타는 장례식용으로 작곡된 장례칸타타이다
장례칸타타의 제목을 보라 도저히 상상도 하기 힘든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붙어있다

하나님의 시간이 최상의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을 눈 앞에 두고 그 칸타타의 가사를 쓴다면
어떤 내용을 담게 될까

보통은 부활을 염두에 둔 표현이나,
아니면 다른 위로의 메세지를 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하는 장례칸타타를 작곡하며
하나님의 시간이
최상의 시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계획 너머에 있으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기에
그가 정해진 시간에 우리는 태어나고, 죽게 마련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정해진 시간을 부조리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
인간의 사고를 뛰어넘는 경의를 표하는 저 신앙이 어찌 위대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 이런 하나하나를 보아도 바하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첫번째 음악에서 나오는 두대의 리코더와 비올라 다감바의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정말 아래 해설처럼 눈물을 흘릴뻔했다..
두번째 곡은 마지막에 Ja, Komm, Herr Jesu, Komm! 하는 소프라노가 잠깐 나오는 부분이 너무너무나
인상적이고,
마지막에 나오는 찬양과 고백의 코랄까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가사까지,
그 뒤에 응답하는 리코더의 두 음까지!
참으로 위대한 고백들로 가득차있는 놀랍고도 아름답고 가녀리면서도 강렬한
아무리 강조해도 아깝지 않을.. 너무너무나 아름다운 칸타타이다. 죽음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한 음악이 과연 세상에
또하나 존재할 수 있을까.. 너무나 아름답다.. 정말 위대한 사람인 것 같다.. Bach..
가사하나하나가 지극히 성경적이면서 자기고백적이고, 경건하고
아주아주 진정으로 하늘의 마음과 성경의 의미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신앙의 깊이의 경지에 도달한 느낌을 준다..
너무너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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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Bach Kantata 106(BWV)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오, 주님,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사 우리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소서.”

인간의 죽음

“Thou wast not born for death, immortal Bird! 너는 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불멸의 새여!” 키이츠는 이렇게 노래했지만, 세계적인 작곡가 알프레트 쉬니트케는 일전에 작고했다. 아니 그가 죽는 마당에 그를 한 훌륭한 음악가 운운하는 것은 구차하게 느껴진다. 그는 한 인간으로 돌아갔고 또한 근원으로 돌아갔다. 죽는 그때 우리는 결국 우리의 모든 허울을 벗어버리고 단지 한 인간으로 돌아가며 한 인간으로 죽는다. 그래서 그 죽은 자가 파푸아 뉴기니의 한 오지인이건 한국의 한 농부이건 아니면 유럽의 한 부호이건 혹은 그외의 누구건 간에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작고했다,’ ‘서거했다’ 하는 식의 말보다는 ‘죽었다’는 직접적이고 소박하며 엄격한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인간의 죽음을 갖가지 수식으로 치장한다. 그러나 한 인간의 죽음을 치장함으로써 그 죽은 사람과 그의 죽음 자체가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서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나 우리에게는 남의 동네 일로서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던 다이애너비의 죽음과 온 세계인에게 큰 슬픔을 주었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의 숙연함을 가져다 주었던 데레사 수녀의 죽음,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 갖가지 수식이 뒤따르지만 그 수식은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엄격한 사실을 다른 어떤 성격의 것으로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다.

굳이 영향을 받고 변하는 것을 찾자면 그것은 바로 살아 남아서 그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이애너의 죽음, 데레사 수녀의 죽음, 쉬니트케의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불행하였으나 아름다웠던 한 여인의 비극적 사고였고, 이기적인 일상의 삶 속에 매몰되고 퇴락하여 사랑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위대한 사랑이 가능함을 보여준 성녀의 서거였고, 20세기적 아름다움을 음악이란 매체에 담아서 제시한 한 위대한 예술가의 작고였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그저 신 앞의 한 인간으로서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는 그 구성원인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그저 사멸하는 사건이나 과정으로만 보지 않았다. (물론 엄격한 유물론자라면 사멸일 뿐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여기서 그것으로 논쟁점을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성찰한 많은 종교와 사상이 있고 제 나름의 대답들을 주고 있다. 어느 종교와 사상을 신봉하느냐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이해와 태도가 크게 다를 수 있겠지만, 이렇게 우리의 이해와 자세를 규정하는 사상과 종교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각 개인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의미를 띠는 사건이고 거기다 가장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이해에는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이해라는 측면이 강하게 들어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개인적 죽음 이해를 가졌다 할지라도 혹은 서로 다른 사상과 종교의 죽음 이해를 가졌다 하더라도 공통적인 것은 누구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렵고 엄숙해지며 숙연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찬과 긍정이 수없이 쏟아지지만 인간의 한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 궁극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엄숙한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죽음이 갖는 의미, 죽음 너머의 의미를 항상 추구한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버리고, 그 영광과 비참함, 쾌락과 고통, 기쁨과 슬픔 마저도 벗어 던지고 구원을 베푸는 지고의 신과의 궁극적 교제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식이건, 윤회의 바퀴를 되풀이 하여 돌다가 언젠가 충분한 덕을 쌓아 해탈한다는 식이건, 또는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가 인민들의 가슴 속에서 남아 영원한 생명을 획득한다는 식이건 간에 인간은 그냥 자연적 소멸 상태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죽음의 의미를 재해석해왔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에게 결산이며, 결산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시작이며, 참되고 궁극적인 상태로의 관문이다. 시작으로서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하다. 다가올 참된 시작으로서의 죽음으로부터 우리는 지금 그 죽음에 걸맞는 삶을 살아갈 동기와 용기 그리고 기쁨을 얻기에…

장례 음악: 칸타타 106번

오늘 바흐가 들려주는 죽음의 노래를 들어보자. 죽음을 소재로 한 바흐의 곡들은 많지만 특히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 속에 죽음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칸타타 106번, “하나님의 시간은 최상의 시간이로다” (추모행사)이다. (Johann Sebastian Bach, Kantate Nr. 106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BWV 106 Actus Tragicus)

이 칸타타는 BWV 80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우리의 주님은 강한 요새로다”와 같은 장대함도 없고 BWV 147 “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 마음과 말씀과 행위와 생명”과 같은 화려함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BWV 4 “Christ lag in Todesbanden, 그리스도는 죽음에 묶이셔도” 처럼 비장하지도 않다. 위와 같은 곡들과 미사 b 단조 등에 비하면 이 곡이 정말 바흐의 작품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럼에도 이 칸타타는 사랑받을 만 하다.

길이는 칸타타로서 그리 짧지는 않으나 반주부의 악기 구성이 단순하고 느낌이 소박하며 끝 곡 외에는 대규모 합창이 없고, 중간 중간 짧은 합창과 독창이 많아서 큰 규모의 곡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독창은 소프라노, 알토, 테노레, 바쏘가 고루 나오며, 반주는 시종 두 대의 블록플뢰테(플라우토 돌체)와 두 대의 비올라 다 감바가 맡고 콘티누오가 첨가된다. 끝 곡의 합창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담담하고 죽음에 대해 차분히 명상하는 분위기이다. 전체가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로 매우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다.

작곡 연대로 볼 때 이 곡은 1707년 뮐하우젠 시대에 작곡된, 초기 칸타타의 걸작이다. 율법의 결말로서 피할 수 없는 죽음과 구원으로서의 죽음이 대비되면서 마지막에는 삼위일체를 찬양하며 종결한다. 이곡이 장례를 위해 작곡된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과연 누구의 장례를 위한 것인지는 명확치 않고 몇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 또한 브람스의 ‘Ein Deutsches Requiem독일어에 의한 렉비엠(레꾸이엠)’과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가 있기도 하다. 이 칸타타를 들으면서 필자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이 곡이 바흐보다 1세기 앞선 쉬츠의 장례 음악 ‘Musikalische Exequien무지칼리셰 엑섹비엔’의 후속작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약 바흐가 위대한 선배의 이 걸작을 알았다면 분명히 그 자신도 그런 곡을 쓰고 싶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동기를 얻거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쉬츠, 바흐, 그리고 브람스의 작품들은 죽음에 대한 그 심오한 성찰과 그 음악적 위대성으로 인해서 독일인에 의해 작곡된 ‘죽음 삼부작’으로 묶을 만하다고 여겨진다.

1. Sonatina – Molto adagio
칸타타는 비올라 다 감바의 이중주로 시작된다. 두 대의 비올라 다 감바가 조용하고 느릿하게 연주하는 고풍스런 도입부를 듣자마자 곧 당신의 마음이 녹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한숨이 흘러 나올 것이다. 이것은 이 곡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아름다운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자신도 모르게 이 곡이 이끄는 데로 조용한 명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뒤이어 블록플뢰테(플라우토 돌체)가 전개해 나가는 맑고도 부드러운 이중주는 때가 끼어 찌든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한 위로감을 준다. 이 이중주는 눈물겹도록 아름답기 때문에 듣다가 곧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회한과 슬픔과 위안과 기쁨이 이 곡의 끝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이 소나티나는 이 칸타타의 서두로서 더없이 어울리는 신포니아이다.

2.a 합창 또는 4중창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하나님의 시간은 최상의 시간이로다”라는 가사의 호모포닉한 4/4박자 합창이 시작되고 “In ihm leben , weben und sind wir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활동하며 또한 존재한다”라는 가사(이 가사는 원래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광장에서 행한 설교 가운데 나오는 사도행전 17:28의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에서 가져온 것이다.)에 의한 3/4박자의 다소 활기있는 푸가가 뒤따르며 “solange er will 그분이 원하실 때까지”로 푸가 부분을 마치고, 다시 4/4박자의 호모포닉한 “In ihm sterben wir zur rechten Zeit, wenn er will 그분이 원하시는 바로 그때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죽는다”로 들어간다.

사람이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는 최상의 때라는 강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가 이 칸타타의 주제로서 제시되는 부분이다.

2.b 아리오소 (테노레)
2.a의 합창에서 중단 없이 이어진 테노레의 아리오소는 “Ach, Herr, lehre uns bedenken, dass wir sterben müßen, auf dass wir klug werden 오, 주님,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사 우리로 하여금 지혜롭게 하소서”을 렌토의 다 단조 4/4로 노래한다. 이 가사는 모세의 시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시편 98:12을 인용한 것인데,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겸허한 삶의 태도를 노래한다. 이 시편을 두어 구절 더 인용해본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2.c 아리아 (바쏘) Vivace
3/8박자의 비바체로 바쏘는 엄하게 재촉한다, “Bestelle dein Haus; denn du wirst sterben und nicht lebendig bleiben 가사를 정리하여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로다.” 플라우토 돌체의 반주도 이 다급한 재촉을 더욱 부추긴다.
가사는 이사야 38:1에서 가져온 것이며 이는 히스기야 왕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이 가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말씀과 달리 히스기야 왕은 죽지 않았다. 왕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의 병을 낫게 하시고 십오년을 더 살게 하셨다.
물론 이 곡에서는 이 내용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사의 출처가 되는 이야기의 이러한 내용은 우연하게도 이 칸타타의 주제를 어느 정도 시사하며, 죽음이 정복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2.d 합창-소프라노 솔로 Andante
이 합창은 바쏘의 재촉을 이어 받아서 엄숙한 선언을 대위법적으로 느리게 노래한다. “Es ist der alte Bund: Mensch, du mußt sterben! 이것은 옛 계약이다. 사람아, 너는 죽어야만 한다!”
가사는 집회서(시락서) 14:17-18에서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집회서의 해당 부분의 내용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자선을 베풀고, 오늘의 행복을 기뻐하며 살라는 것이다.) 옛 계약이란 어떤 것인가? 지고의 행복 상태, 절대자와의 완전한 교제 속에 살던 그때 주어졌던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약속인가? 아니면 결국 이 신과의 교제의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타락의 길을 택한 뒤에 주어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라는 선고인가? 어쨌든 죽음은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냉혹하고 엄격한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절망적 상황은 구원자를 애타게 고대하게 한다. 이 간구를 소프라노가 솔로로 노래한다. “Ja, komm, Herr Jesu! 그러하오면, 주 예수여, 오소서!” 간절하면서도 맑고 아름다운 노래이다. 다시 대위법적인 합창이 나와서 소프라노의 간구와 얽힌다. 옛 판결로 죽음의 사슬에 얽매인 연약한 인간이 구원자가 오기를 애타게 기원하는 모습을 간결하고도 적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로써 제2곡이 끝난다.

3.a 아리아 (알토)
제2곡의 간구가 끝나면 콘티누오가 먼저 상승 음계를 연주하면서 제3곡이 시작된다. 알토가 “In deine Hände befehl’ ich meinen Geist; du hast mich erlöset, Herr, getreuer Gott.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당신이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여, 나의 신실한 하나님이시여”라고 내림사단조로 노래하고 반주는 시종 콘티누오가 맡는다.

이 가사의 앞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면서 한 말이다 (누가복음 23:46). 동시에 이 가사 전체는 시편 31:5(원전인 히브리 성서와 독일어 번역본 성서에서는 6절)을 인용한 것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구원을 고대하던 인간은 결국 그 구원을 확신하면서 절대자에게 자신을 맡긴다.

3.b 아리오소 (바쏘)-알토 투티
알토의 짧은 아리아가 끝나고 콘티누오가 계속 흐르는 가운데 가장조의 바쏘 아리오소에 의한 구원의 선언이 이어진다. “Heute wirst du mit mir im Paradies sein.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가사는 누가복음 23:43에서 인용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양편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악한들 중 하나가 자비를 구하자 그에게 하신 말씀이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2-43)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와 비참함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신은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또 구원하신다. 누가복음 23:32, 39에 행악자(까꾸르고스)라고 성서에 기록된 이 사형수는 흉악한 악행 끝에 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면서 혹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을 구하고자 무력 저항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잡혀서 처형당하면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참고한다면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단,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누가복음과는 달리 두 강도가 모두 예수를 욕하였다고 적고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이 둘을 ‘레-스따이’라고 부르는데 이말은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제국에 무력으로 저항운동을 벌이던 무장강도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는 옆에서 자신과 함께 고통 당하며 죽어가는 연약한 사내를 본다. 아직도 혈기와 오만함을 잃지 않고 이 연약한 사내를 조롱하는 자신의 동료 사형수와는 달리, 그는 이 연약한 사내가 곧 인간의 모든 한계와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과 함께 고통당하는 신임을 알아챈다. 그는 그 연약한 신에게 자신을 맡긴다.

신은 매일 우리의 고통과 함께 고통 당하고 우리의 죽음과 함께 죽음 당한다. 어떤 절대자가 우리의 고통, 우리의 슬픔, 우리의 한계를 함께 당하고 경험하지 않는다면, 저 먼 하늘에만 있다면, 인간과 동떨어져서 뛰어난 지적 능력과 힘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시하고 가르치기만 한다면 그런 그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것들이 다 절대자로서의 모습으로서 중요시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다만 그 뿐이라면 그는 우리 인간과는 관계없는 이론적인 신, 관념 속의 절대자일 수 밖에 없다. 초월자인 신은 인간이 되어야 하고 인간으로서 함께 고통 받으며 인간으로서 함께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그가 인간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바쏘의 아리오소는 곧 알토 투티에 의해 불려지는 코랄과 어우러지고 두대의 비올라 다 감바가 반주에 가세하여 전체적으로 폴리포닉하게 엮어지면서 아름다운 코랄 편곡이 된다. 이 코랄의 가사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1524)에 의한 것이다.

Mit Fried’ und Freud ich far dahin 평화롭고도 즐겁게 나는 저곳으로 떠나간다
In Gottes Willen, 하나님의 뜻 가운데,
Getrost ist mir mein Herz und Sinn, 나의 마음과 넋은 확신에 차고
Sanft und stille. 평온하며 고요하다.
Wie Gott mir verheissen hat: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Der Tod ist mein Schlaf worden. 죽음은 나의 잠이 되리라.

이 곡의 끝 부분은 바쏘 의 아리오소가 끝나고 “Wie Gott mir verheissen …”의 합창이 비올라 다 감바의 반주로 느릿하게 이어지면서 종결하는데 이 짧은 종결부는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루터의 이 코랄 가사에는 두 가지의 모순된 사상이 엿보이는데, 죽음을 통하여 저 세상, 곧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간다는 사상과 죽음은 이 최후의 심판 때에 있을 부활에 이르도록 잠자는 상태라는 사상이다. 이 모순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해설할 수는 없다. 그저 여기서 노래하는 죽음은 이미 얻은 구원의 약속에 따라 궁극적 구원의 상태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제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 옛날의 엄격한 멸망의 선고가 아니며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멸망은 구원으로 바뀌었다.

4. 코랄 합창
플라우토 돌체와 비올라 다 감바가 모두 참여한 단순하고 짧은 서주로 곡이 시작되면 호모포닉한 합창이 시작된다. 코랄 가사는 아담 로이스너에 의한 것이다.

Glorie, Lob, Ehr und Herrlichkeit 영광과 찬양과 존귀와 위엄이
sei dir, Gott Vater und Sohn, bereit’, 성부와 성자시여, 당신들께 있기를
Dem Heil’gen Geist mit Namen! 또한 성령의 이름 위에 있기를!
Die göttlich Kraft 하나님의 능력이
Macht uns sieghaft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도다,
Durch Jesum Christum, Amen.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멘

합창은 “macht uns sieghaft”까지 단순한 코랄 선율을 호모포닉(homophonic)하게 노래한다. 이윽고 “durch Jesum Christum”에 이르면 갑자기 allegro의 대단히 활기있고 복잡한 푸가가 된다. 썩 길지는 않지만, 구원을 베푸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리고 직접 인간이 되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예수의 이름을 찬미하는 화려한 푸가는 이 칸타타를 끝맺기에 손색이 없다. 합창은 환희에 가득 차서 “두르히 예줌 크리스툼”을 외치며 엮어나가고, 종결로 치달으며 반복되는 아멘 다음에 마지막으로 합창이 다시 한 번 아멘을 외치면 플라우테 돌체와 비올라 다 감바는 이 아멘을 그대로 받아서 피아노(여리게)로 응답함으로써 이 칸타타는 끝맺는다.

바흐와 죽음

단지 음악적인 면에서 본다면 바흐의 칸타타를 소개함에 있어서 이 곡이 첫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보다 크고 웅대하며 기법적으로도 훨씬 정교하고 다채로운 곡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곡은 단순하고 소박한 가운데 굳이 외부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깊이가 있다. 그리고 이 곡에는 바흐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태도가 있다. 그것은 절대자 안에서 살며 활동하다가, 그가 부를 때 기쁘게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의 시간은 최상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바흐는 만년에 시력을 잃고 암흑 속에서 살았다. 앞을 볼 수 없는 처지에서도 그는 악보를 구술하면서 만년의 대작이자 그의 생애를 총 결산하는 을 작곡했다. 그런데 그는 이 푸가의 기법의 마지막 곡을 자신의 이름인 B-A-C-H를 새겨 넣은 “세 개의 주제에 의한 푸가”로 작곡함으로써 자신의 생애를 결산하는 곡으로 삼으려 했었던 듯 하다. 그러나 그는 이 곡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푸가의 기법>의 종결곡은 끝을 맺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져 버린다. 그 곡을 끝내는 것과 상관없이 신은 ‘이제 그만 그것들 다 남겨두고 오라’고 그를 부른 것이다.

사람들은 도중에 끊어져 버리는 이 곡을 어떻게든 끝맺으려고 바흐의 코랄 편곡 중 한 곡을 끝에 붙여 연주한다. (조르디 사발이 이끄는 에스페리옹 XX의 연주처럼 미완성에서 끝내고 마는 연주도 있다.) 원래 바흐의 아들 프리드만이 유고를 출판하면서 이 코랄을 붙여 넣었다. 이 코랄은 바흐가 원래 이 곡집에 포함시키려던 것이 아닌 것으로 해석하여 일반적인 출판에서는 제외하지만, 이 코랄이 푸가의 기법의 종곡과 성격적으로 잘 어울리므로 이 곡을 덧붙여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 연결이 자연스럽다. 이 코랄의 이름은 “Vo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 여기서 제가 당신의 보좌로 나아갑니다”이다. 그의 미완성인 최후의 작품을 장식하는 곡으로서 참으로 잘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코랄 선율은 “Wenn wir in h&ouml;chsten N&ouml;ten sein 우리가 지극한 곤궁에 처해 있을 때”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같은 선율에 두 가지의 코랄 가사가 다 쓰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그의 칸타타 BWV 161 “Komm, du s&uuml;sse Todesstunde 오라, 너 달콤한 죽음이여” 가 있다. 종교적 이해 없이 제목을 잘못 읽으면 염세주의로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성격의 곡은 결코 아니다. 또한 삼위일체 축일 후 열여섯 번째 주일을 위해서 작곡한 BWV 8, 27, 95, 161도 모두 죽음을 소재로 한 곡들이다. 이런 곡들을 통하여 바하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바하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하여 얻어지는 궁극적인 안식이며, 신을 앙망하는 자 모두가 동경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하가 죽음 예찬론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생을 긍정하는 수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그의 작품 속에는 그의 끈질긴 생의 욕구를 유감없이 느낄 수 있다. 또 그 자신이 그렇게 끈질기게 추구하는 생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 생을 최후의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절대자 앞으로 갈 때 미련없이 버릴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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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가사

1. Sonatina
Flauto I/II, Viola da gamba I/II, Continuo – –

2a. Chorus [Dictum] (S,A,T,B)
Flauto I/II, Viola da gamba I/II, Continuo

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
In ihm leben, weben und sind wir, solange er will.
In ihm sterben wir zur rechten Zeit, wenn er will.

God’s own time is the very best of times.
In him living, moving, we exist, as long as he wills.
In him shall we die at the right time, when he wills.

하나님의 시간이 최상의 시간이로다
그의 안에 그의 뜻에 의해 우리의 삶과 죽음, 존재가 있나니
그의 안에 그가 뜻하는 때 우리는 적당한 시기에 죽게 될 것이다

2b. Arioso [Dictum] (T)
Flauto I/II, Viola da gamba I/II, Continuo

Ach, Herr, lehre uns bedenken,
daß wir sterben mossen,
auf daß wir klug werden.

Ah, Lord, teach us to remember that our death is certain,
that we might gain wisdom.

오 주여 우리에게 우리의 죽음이 확실한 것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사
지혜를 얻게 하소서

2c. Aria [Dictum] (B)
Flauto I/II, Viola da gamba I/II, Continuo

Bestelle dein Haus;
denn du wirst sterben und nicht lebendig bleiben.

Set ready thine house;
for thou shalt perish and not continue living!
당신의 집을 준비하라
네가 더이상 살지 못하고 썩게될 터이니!

2d. Chorus and Arioso [Dictum] (S,A,T,B and S) with Instr. Chorale (S,A,T,B)
Flauto I/II, Viola da gamba I/II, Continuo

Es ist der alte Bund: Mensch, du mußt sterben!
Sopran
Ja, komm, Herr Jesu, komm!

This is the ancient law:
man, thou must perish!
(S)
Yes, come, Lord Jesus!

이것은 고대의 법이니
사람은 반드시 썩게되리라
그렇습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3a. Aria [Dictum] (A)
Viola da gamba I/II, Continuo

In deine Honde befehl ich meinen Geist;
du hast mich erloset, Herr, du getreuer Gott.

Into thine hands now do I commit my soul;
for thou hast redeemed me, Lord, thou my faithful God.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당신이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주여,
나의 신실한 하나님이시여

3b. Arioso [Dictum](1) (B) and Chorale (A)
Viola da gamba I/II, Continuo

Heute wirst du mit mir im Paradies sein.
Mit Fried und Freud ich fahr dahin
In Gottes Willen,
Getrost ist mir mein Herz und Sinn,
Sanft und stille.
Wie Gott mir verheißen hat:
Der Tod ist mein Schlaf geworden.

This day shalt thou with me in paradise be.
In peace and joy do I depart,
As God doth will it;
Consoled am I in heart and mind,
Calm and quiet.
As God me his promise gave:
My death is changed to slumber.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평화롭고도 즐겁게 나는 저곳으로 떠나간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의 마음과 넋은 확신에 차고
평온하며 고요하다.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죽음은 나의 잠이 되리라.

4. Chorale (S,A,T,B)
Flauto I/II, Viola da gamba I/II, Continuo

Glorie, Lob, Ehr und Herrlichkeit
Sei dir, Gott Vater und Sohn bereit,
Dem heilgen Geist mit Namen!
Die gottlich Kraft
Mach uns sieghaft
Durch Jesum Christum, Amen.

Glory, laud, praise and majesty
To thee, God, Father, and Son, be giv’n,
The Holy Ghost, with these names!
May godly strength
Make us triumph
Through Jesus Christ, Lord, Amen.

영광과 존귀와 찬송과 위엄이
당신께, 하나님 아버지와 주신 아들께,
성령께 있기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승리케하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멘

Es ist vollbracht, 요한수난곡에서

 

Evangelist (복음서가)
Da stund ein Gefaße voll Essigs. Sie fulleten aber einen Schwamm mit Essig und legten ihn um einen Isopen, und hielten es ihm dar zum Munde. Da nun Jesus den Essig genommen hatte, (포도주 잔을 들고 서있던 자들이 그것을 스펀지에 적셔 나무가지 끝에 꽂아, 예수의 입에 대자, 예수는 거부하고,)
sprach er: (가라사대)

Jesus (예수)
Es ist vollbracht! (다 이루었다)
 
 
30. Aria A
Violino I/II, Viola, Viola da gamba sola, Continuo 


Es ist vollbracht! (다 이루었다.)
O Trost vor die gekrankten Seelen! (상처받은 영혼의 위로!)
Die Trauernacht (슬픔의 밤)
Laßt nun die letzte Stunde zahlen. (최후의 때가 되도다.)
Der Held aus Juda siegt mit Macht (유대의 왕, 힘으로써 승리하고)
Und schließt den Kampf. (싸움은 끝나도다.)
Es ist vollbracht!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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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수난곡에 나오는 곡으로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곡이다.
특히 비올라 다 감바의 영혼을 할퀴는 듯한 음색이 노래하듯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마음처럼,
겸손하면서도 비장한 각오로 무장된 듯이 흘러간다.


소프라노가 아리아를 부른다.
슬픔과 그러한 슬픔이 주는 위로.


갑자기 그의 죽음이 싸움에서의 승리임을 노래할 때
순간 다른 곡으로 변한 것처럼 힘이 넘친다.
모든 싸움은 끝났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은 다시 조용히 예수의 마지막 한마디 ‘다 이루었다’를 가슴에 되뇌이며
아리아가 끝난다.

Cantata BWV 82 “Ich habe genug”

Cantata BWV 82 “Ich habe genug”
칸타타 BWV 82 “나는 만족하나이다


2. Rezitativ: Ich habe genug.
Mein Trost ist nur allein
B Continuo

Ich habe genug.
Mein Trost ist nur allein,
Dass Jesus mein und ich sein eigen m&ouml;chte sein.
Im Glauben halt ich ihn,
Da seh ich auch mit Simeon
Die Freude jenes Lebens schon.
Laßt uns mit diesem Manne ziehn!
Ach! m&ouml;chte mich von meines Leibes Ketten
Der Herr erretten;
Ach! w&auml;re doch mein Abschied hier,
Mit Freuden sagt ich, Welt, zu dir:
Ich habe genug.

2. Recitavivo
이제 됐습니다.
오로지 나의 예수이시고 저 또한 예수께 속하기를
원하옵나이다. 믿음 속에서 그를 생각하며 저편 삶 속의
기쁨을 시메온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 이분과 함께 가도록 하지요. 아! 이분께서 저를
인생의 쇠사슬에서 구원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 제가 이곳에서 이별을 고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만 됐습니다

3. Arie: Schlummert ein, ihr matten Augen
Aria B Violino I/II, Viola, Continuo

Schlummert ein, ihr matten Augen,
Fallet sanft und selig zu!
Welt, ich bleibe nicht mehr hier,
Hab ich doch kein Teil an dir,
Das der Seele k&ouml;nnte taugen.
Hier muss ich das Elend bauen,
Aber dort, dort werd ich schauen
S&uuml;ßen Friede, stille Ruh.

3. Aria
Schlummertt ein (이제 잠자거라)
이제 잠자거라. 너의 눈이 매우 피곤하구나.
부드럽고 고요한 휴식으로 내려 앉으라!

세상아, 나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에게서 나의 영혼에 평안을 줄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기에..

이곳에서 나는 고통 속에 살았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그 곳에서 나는 보았다.
달콤한 휴식과 고요한 안식을…

—————
이 82번 칸타타는 Bass 혼자서 끝까지 진행되는 Solo Cantata 입니다
이 곡은 Bach 의 죽음에 대한 동경, 안식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음악을 들으면 마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처럼 편안합니다
이 음악은 나를 이해해주는 것 같습니다
영혼의 자장가처럼 안식을 꿈꿉니다

슈바이처의 Bach 연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Liebster Jesu, wir sind hier, BWV 731
(복된 예수여, 주 말씀 앞에)

Chorale Text
German:
Liebster Jesu, wir sind hier,
dich und dein Wort unzuh&ouml;ren;
lenke Sinnen und Begier
auf die s&uuml;ssen Himmelslehren,
dass die Herzen von der Erden
ganz zu dir gezogen werden.

English:
Blessed Jesu, at Thy word
We are gathered all to hear Thee;
Let our hearts and souls be stirred
Now to seek and love and fear Thee;
By Thy teachings sweet and holy
Drawn from earth to love Thee solely.
–Tr. C. Winkworth

복된 예수여, 당신 말씀 앞에
우리 당신을 듣기 위해 모였나이다.
우리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소서.
이제 당신을 찾고, 사랑하며, 경외할 수 있도록;
당신의 달콤하고 거룩한 가르침은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도록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내셨습니다.

—————–

이 곡은 바하의 오르간 코랄 편곡집에 있는 곡이다.
이 연주는 놀랍게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슈바이처 박사의 연주이다.
헌신적인 삶, 의사면서, 신학가
그보다 나는 그가 오르간 연주가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러웠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특히 바하의 오르간 곡을 그가 연주한 걸 들으면서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귀로 읽어내면서
음악 속에 그가 숨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음악 속에서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음악 하나만 듣고도 참으로 존경의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두번째 연주 – Organ : Gustav Leonhardt)

(세번째 연주 – 원곡 코랄 BWV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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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퍼온 글

그가 이룬 위대한 업적 때문일까. 아니면 그에게 쏟아진 수많은 찬사들과 존경심 때문일까.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가 어떤 음악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슈바이처가 어떤 태도로 음악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잘 모르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인들마저 슈바이처를 오르간을 잘 쳤던 의학박사 정도로만 안다는 것은 실망이다. 왜냐하면 슈바이처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삶의 여러 가지 활력소 중 하나가 아니라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의 삶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그가 보여 준 위대한 인류애뿐 아니라 음악에 있어서도 기꺼이 모실 만한 스승이 되기 때문이다.

슈바이처는 다섯 살 때 목사인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목사였던 외할아버지도 파이프 오르간의 열렬한 연구가일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다. 슈바이처는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에 다니기 위해 뮈르하우젠에 있는 큰아버지 집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는 거기서도 큰어머니의 배려로 피아노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뮈르하우젠 교회로 부임해 온 젊은 오르가니스트 유진 뮌히에게 정식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배우는 행운도 거머쥐게 된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학적 깊이를 인정받는 바하에 대한 슈바이처의 깊은 식견과 사랑은 바로 유진 뮌히 선생의 영향이었다. 김나지움을 마친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으로 향하게 된다. 법학과 신학과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희망을 안고서. 유진 뮌히 선생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성 스테판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있는 동생 에른스트 뮌히에게 슈바이처를 연결해 주었고, 바하는 그 선생 아래서 바하의 거의 모든 오르간곡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음악에 관한 한 슈바이처의 욕심은 그칠 줄을 몰라 방학 때가 되면 그의 숙모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갔다. 그 때 사사하게 된 스승이 당시 불란서의 가장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뷔도르(Charles-Marie Widor)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트라스부르에서 슈바이처가 음악만을 공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24살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다음 해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학위를 얻고나자 스트라스부르 대학은 그에게 강사 자리를, 그리고 통독의 도화선이 되었던 성 니콜라이 교회는 부목사 자리를 맡기게 된다. 이것이 1900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런 변화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는 피아노와 파이프 오르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뷔도르 선생이 제안한 바흐 연구서를 100여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 권위를 인정받을 정도의 깊이로 창작해 낸다. 그것이 이란 책이다. 이 책은 1905년 불어판으로 나왔다가 4년 뒤인 1909년에는 독일어판으로 다시 나오게 되는데 그 분량이 불어판에 비해 배나 된다. 그의 나이 약관 30세였으나 그 책으로 슈바이처는 유럽 음악계에 혜성처럼 떠올랐을 뿐 아니라 스승 뷔도르는 물론이고 가브리엘 포레, ‘마법사의 제자’로 유명한 뒤카스, 댕디 등 불란서 최고의 음악가들이 바흐 협회를 결성하고 상임 오르가니스트에 그를 추대하게 된다. 오늘날도 바흐를 연구하는 모든 음악도들은 슈피타의 <바흐>와 함께 슈바이처의 을 필독해야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음악도들과는 달리 슈바이처는 이미 대학생 때 자기 삶의 목표를 세운 게 분명하다.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 남에게 베푸는 인생을 살자. 그러기 위해 30세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에는 인류를 위해서 살자.”
그가 29세 되던 해 어느 날, 슈바이처는 기숙사에 놓인 잡지를 우연히 보게 된다. “이 곳에는 의사도 없습니다. 약도 없습니다. 의사이신 분은 와 주십시오.”

이런 내용의 선교 호소가 들어있는 글을 읽으면서 슈바이처는 엉뚱하게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용솟음친 것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나서서 말렸다. 슈바이처는 하나님의 뜻대로 불쌍한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포기하지 않고 스트라스부르 의과대학을 이수하기 시작한다. 7년 뒤 1912년, 마침내 슈바이처는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 다음 해 대학의 교직, 음악학자로서의 지위와 명성,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직을 모두 버리고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간다.

그러나 음악도인 내가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있다. 병원을 짓기 위해, 또는 의약품을 구입하기 위해 돈이 궁할 때마다 슈바이처는 유럽으로 날아 가 연주를 했다는 사실이다. 슈바이처가 1차 대전 때 전쟁 포로가 되어 고생을 했다는 기록도 고통 없이 읽히지 않는다. 포로에서 풀려나자 그는 또다시 돌아와(그러니까 유럽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강연과 오르간 연주로 병원 운영 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했다. 이처럼 아프리카에 있으면서도 슈바이처는 음악 공부와 피아노(아프리카엔 당시 오르간이 없었으니까) 연주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 몇 달 전에 베르거와 함께 끝낸 <바흐 오르간 대전집>은 젊은 시절의 바흐 연구서에 결코 손색이 없는 대작이다. 그렇게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라와 아프리카에서 봉사를 하던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슈바이처 앞에 서면 음악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실 그가 남긴 몇 장의 오르간 연주회 음반을 듣는다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그의 삶과 정신 때문이다. 슈바이처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음악과 인생뿐이 아니다. 돈, 사역이란 단어 역시 무겁게 다가온다. 슈바이처는 바흐 전문 오르가니스트였지만 자신의 연주를 사역이라 생각한 것 같지 않다. 또한 그는 유럽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인 자신이 돈을 위해 연주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기가 아니라 아프리카인들이었으므로. 때문에 나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바로 여기서, 노래 가사 속에 의식을 담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 찬양 관계자들이 자신들을 사역자로 자처하는 것이 몹시도 민망한 것이다. 슈바이처가 한국 교회 음악의 귀한 모범으로 보이는 것은 그가 음악과 사역의 순서를 바로잡아 주기 때문이다. 음악과 인생의 우선 순위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슈바이처와 같은 젊은 후배들이 그립다.

http://insamo.org/ys/bbs/read.cgi?board=book_board&y_number=142&nne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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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알자스의 카이젤부르그에서 태어나 권스바흐에서 자랐고 1965년 9월 4일 아프리카 람바라네에서 영면하였다.

슈바이처는 “나에게 천부적인 재질같은 것은 없었다. 굳이 있다면 음악의 재능 정도이었다. “라고 쓴 적이 있다.

슈바이처는 5살 때에 목사였던 부친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 피아노는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부친에게 준 것이었는데, 이 외할아버지도 역시 목사이면서 파이프오르간의 열렬한 연구가였다. 슈바이처의 음악의 재능은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었다. 권스바하의 목사관과 교회, 파이프 오르간과 함께 그는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을 배우며 성장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뮤르하우젠의 백부의 집에 기거하며 김나지움 시기를 보냈는데, 백모는 “피아노는 후에 꼭 유용할 것”이라며 그에게 피아노 교육을 시켰다. 그 뮤르하우젠의 교회에는 베를린의 음악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오르가니스트 유진 뮨히가 있어 그에게 파이프 오르간을 정식으로 배웠고 바하의 음악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슈트라스부르그 대학에 진학했는데 그 곳의 성 스테판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유진의 동생 에른스트뮌히로 그의 밑에서 바하의 오르간 곡을 거의 습득하였고 칸타타의 연주에서는 항상 오르간 파트를 맡았다. 대학시절 슈바이처는 방학 때마다 파리로 갔다. 그 곳에 거주하는 숙모인 마틸드 슈바이처가 명오르가니스트 샤르 마리 비도르와의 만남을 주선하여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처음 만났을 때 어떤 곡을 연주해 보겠느냐는 물음에 “물론 바하입니다”라고 슈바이처는 답했고 그 이래로 두 사람은 친밀한 사제간의 정을 맺게 되었다.

비도르는 파리 음악학교의 오르간과의 교수로 명연주가로도 유명했지만 엄격한 레슨으로도 유명하며 음악학교의 제자 이외에 제자를 두는 법이 없었으나 슈바이처만은 예외였다. 휴가중에도 레슨을 해 주고 슈바이처가 아직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 배를 곯고 다니는 것을 알자 자주 가는 레스토랑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베를린의 음악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바하 연구열이 파리에서도 일어 여기저기에서 바하의 음악이 흘러 나왔다. 비도르는 프랑스에 이야기형식의 바하서적은 있지만 연구서가 출판되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 출판을 기다려 왔는데, 베를린 음악학교 출신으로 바하에 조예가 깊은 뮨히 형제를 스승으로 두고 바하에 깊은 관심을 가진 슈바이처에게 이를 권유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슈페터의 바하 전기가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평전 형식의 명저였다. 슈바이처는 여기에 악곡의 해석과 연주상의 주의 등을 곁들여 볼 것을 생각하고 스승 비도르의 권유를 받아들인다.

1899년 24살 때 철학박사, 이듬해 신학박사의 학위를 딴 슈바이처는 모교 슈트라스부르그 대학의 강사 성 니콜라이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피아노와 파이프 오르간의 공부도 중단하지 않았다. 1905년 드디어 프랑스어판 <바하>가 파리의 프라이트코프사에서 출판되었다. 슈바이처는 알자스태생으로 프랑스어도 독일어 못지 않게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는데 책은 예상외로 호평을 받았다. 이 책은 슈바이처를 비도르와 만나게 해 준 마틸드 슈바이처에게 헌정되었고 비도르가 서문을 썼다. 455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다. 그 해 파리에서는 듀프레, 뒤카, 포레, 규이만, 댕디, 비도르등을 중심으로 바하협회가 결성되었는데 슈바이처는 상임 오르가니스트에 추대되었다. 그의 나이 30세때의 일이다.

슈바이처의 바하는 대단한 호평을 받아 출판사인 프라이트코프로부터 독일어판의 출판도 의뢰받았다. 슈바이처는 증보개정하여 1909년 독일어판도 출판되었는데 프랑스어판의 두배에 달하는 844페이지라는 대작이었다. 이 책은 슈페터의 바하전기와 더불어 바하연구가의 필독서로 꼽힌다.

이 바하의 부산물로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과 오르간 예술>이 출판되었다. 교회관계자, 음악관계자들의 앙케이트를 토대로 한 것으로 기계제작과 맞먹는 수공의 파아프 오르간의 장점과 특징을 찬미하고 그 보존을 강조하고 있다. 또 1909년 빈에서 국제 오르간 제작가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거기서 결정된 국제조례는 슈바이처가 기초한 것이다.

슈바이처는 21살의 대학생 시절에 자신은 30세까지는 학문과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되었고 30세 이후에는 직접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29세 되던 해 ‘적도 아프리카에서 전도상 시급한 일은 의술을 익힌 신앙인을 파견하는 일…. 주님의 뜻을 따를 자를 교회는 기다린다’는 기사를 읽은 후 바로 여기에 직접 인간에게 봉사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30세 때에 모교 슈트라스부르그 대학의 의학과정에 진학하였다. 슈바이처는 주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의학을 지망하였고 그것은 문자 그대로 소명의 의학이었다. 대학강사, 목사, 바하 연구가, 뛰어난 연주자(오르가니스트) 그리고 의학생이었다.

“…나는 건강했다. 밤 늦게까지 공부할 수 있어 학위논문이 음악이나 사교에 의해 방해받는 일 따위는 없었다. 공부에 쫏겨 철야한 다음 날 아침 비들에게 파이프 오르간 연주의 레슨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라고 슈바이처는 술회했다.

7년의 의학코스를 마치고 1912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이듬해 38살 때 적도 아프리카의 람바라네로 건너가 흑인환자의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봉사에 희생은 으래껏 따르게 마련이지만 슈바이처는 교회의 성직, 대학의 교직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지위와 명성을 희생하였다.

적도 아프리카로 건너 갈 때 슈바이처가 가장 아쉬워 한 것은 음악 생활을 단념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파리의 바하협회가 제작자 가보에게 방서방습을 고려한 오르간의 페달을 단 피아노를 특별 제작하여 보내 주었다. 그 덕분으로 슈바이처는 피아노를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람바라네에서도 음악을 향유할 수 있었다. 남십자성이 빛나는 밤에 슈바이처는 마음껏 피아노를 두드렸다. 연주회를 위한 정해진 연습도 아니었고 청중을 의식할 필요도 없이 바하에 몰두, 침잠하여 한껏 바하를 추구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의 피아노, 오르간 솜씨는 아프리카에서 떨어지기는 커녕 더욱 향상되어 만개했다.

그 후 두번의 세계대전을 아프리카에서 경험한 슈바이처는 병원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슈바이처는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으로 약품과 의약재료를 사모았고, 기부금을 받아 병원을 운영하였다. 흑인환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는 늙은 흑인들을 구하고 유럽에서는 낡은 오르간을 구했다”라고 평한 사람도 있었다.

명저 바하외에 슈바이처는 스승 비도르와 함께 샤마社의 요청으로 바하의 오르간 곡집을 감수 출판했고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에드워드 니스베르거와 함께 1965년에 완성했고 수개월 후 영면하였다. 슈바이처는 바하의 탁월한 연구가이며 이론가였던 동시에 뛰어난 연주가였다. 음악적인 면에서 그의 생애를 바하에게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결코 천부적인 재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노력만이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바하를 간접체험한 사람만이 바하의 음악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슈바이처야 말로 진정한 바하의 체험자였다고 할 수 있다.